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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던지는 21가지 질문

by dig it 2023. 8. 1.

우연히 글을 보게되었는데 좋네요

https://blog.naver.com/chunsyha/221230981847

 

1. 인생은 왜 짧은가
2. 삶은 왜 불공평한가
3.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인가
4.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가
5. 왜 그토록 행복을 갈망하는가
6.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7. 일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
8.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9. 피자를 나누는 가장 정의로운 방법은
10. 열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일 것인가
11. 법은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있는가
12. 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13.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한가
14. 탐욕을 부리면 왜 안 되는가
15. 모든 것이 결정된 세계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16. 왜 역지사지가 필요한가
17. 용서는 왜, 어떻게 하는 것인가
18. 엿듣기와 엿보기는 늘 나쁜 일인가
19.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가
20.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21. 인간에게 죽을 권리를 허용해야 하는가

 

 

옛날에 나무 네 그루가 모여 살았다.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고 뽐냈다.
첫번째 나무는 "난 단단하고 몸통이 곧게 자라서 최고급 가구를 만든느 목수들이 나를 찾지."
두번째 나무는 "난 맛있는 열매를 많이 맺어. 어린 아이들이 나를 아주 좋아해"
세번째 나무는 "나는 향기로운 예쁜 꽃을 많이 맺어서 귀부인들이 날 무척 사랑해"
네번째 나무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못한다.
이윽고 세 나무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베어졌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네번째 나무만 덩그러니 남는다.
더운 여름이 오자 이 나무 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 이 나무 그늘 정말 시원하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2500여년 전 장자가 말한 무용지용 즉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우화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회사에서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연구원이 있었다. 하지만 개발하는 것마다 접착력이 떨어지자 그는 
"이 쓸모 없는 접착제 필요한 사람은 가져다 쓰세요" 
사내 공고를 내어 처분했다.
이때 마침 한 연구원이 이 접착제를 쓴다. 이 연구원은 쓸모없는 이 접착제를 사용해보니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이것을 시장에 내놓자 대박이 터진다. 바로 3M의 포스트잇 이야기다. 쓸모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이 된 실제 사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그리고 철학도 그렇다. 쓸 데가 없다며 만약 자식이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날에는 부모로부터 핀잔받기 일쑤다. 확실히 철학은 당장 돈이나 권력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하지만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준다. 옛 성인들로부터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고전으로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철학적 사고가 되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확실한 차이가 난다. 뭘하더라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무용지용, 철학과의 만남이 얼마만큼 쓸모 있을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렸다.

 


1. 인생은 왜 짧은가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 존 러스킨

(1) 그 많던 시간 어디로 갔을까
네덜란드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는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 망원경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다. 망원경을 통해 사물을 보면 손에 잡힐 듯 선명하여 그 물체까지 거리가 실제보다 짧게 느껴진다. 우리가 과거를 볼 때에도 지난 기억들이 확대되어 보이기에 시간의 거리가 축소된다.

(2) 인생이 짧은 세 가지 이유
1) 할 일이 많아서 인생이 짧다. 시간은 공급보다 수요가 더 많다.
2) 과거를 망각하기에 인생이 짧다. 소소한 일상들은 지워지고 강렬한 사건만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는 것이 기억이다. 그렇게 선별적인 기억만으로 이어져 있으니 짧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망각은 축복이다. 과거의 실패에 얽매여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하고, 과거의 성공에 얽매여 있으면 왜 잘됐는지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과거 방식만 반복하기 쉽다.
3) 시간을 낭비하기에 인생이 짧다. 과거 회상을 반복하면 현재는 멈추고 그 안에 갇히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현재가 시들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을 때 과거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면서 짧은 인생을 더 짧게 쓴다.

(3) 내일이 궁금해지는 순간
계획이 있으면 내일이 궁금해진다. 니체는
"이 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고 내가 해낼 일이 궁금해진다. 그렇게 궁금해지는 순간 우리는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호기심이 있다는 건 인생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다.
내일이 궁금하고, 내년이 궁금하고, 앞으로의 시간이 궁금하면 인생은 짧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지겨운 인생 지금까지 이어왔구나' 라고 탄식할 것인가, '즐기기에도 짧은 생이었다' 라며 여한 없이 눈을 감을 것인가.


2. 삶은 왜 불공평한가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
- 빌 게이츠

(1) 불평등의 핵심, 가족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보기에 삶이 불공평해지는 주요 원인은 가족에 있었다.
첫째, 구성원마다 각기 다른 재능을 지닌 채 태어난다.
둘째,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다르다.
셋째, 교육 수준이 다르다.
이상 DNA, 재산, 교육의 불평등이 유발하는 이 세 가지가 나오는 곳이 바로 가족이다.
결국 인간의 불평등은 가족이라는 제도에 기인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가족을 해체시켜야 불평등을 유발하는 조건을 없애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고로 플라톤도 인간 불평드의 기원을 가족에서 찾았다. 사유재산 등 모든 개인적 이익을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로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향을 위해 인간을 세 가지 계급으로 나눴다. 철인왕, 전사계급, 노동자 계급. 그리고 이중에서 전사계급은 다부다처제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보다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이 앞서면 국가 존립에 난항을 겪게 된다. 하지만 다부다처제는 애착의 정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개별적 가족보다는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싸울 수 있다.

(2) 공평, 불공평에 대한 여러 입장들
예수는 남과 비교하지말라,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공평과 불공평을 따지기 위해서는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이에 예수는 비교하지 않으면 불공평도 없다고 말했다.

존 롤스는 자신의 재능, 노력하려는 의지마저도 개인적 재산으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재능은 DNA, 노력 의지는 그런 좋은 의지를 갖도록 만들어준 주변 환경 덕분) 단지 공동적 재산만이 있을 뿐이라 지적했다. 그래서 사회 최하위 계층이 '그래도 이 정도면 나는 살만하다' 라고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도록 상위 계층의 소득을 분배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했다. 이것이 차등의 원칙이다.

로버트 노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소유에 대해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면 그 분배는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각자의 자유에 의해 맺은 자발적 계약의 결과로 발생하는 불평등은 정당한 것이다. 각 개인은 노동에 따른 결과물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고, 그것을 자발적인 합의를 통해 타인과 교환할 수 있다.

데이비드 흄은 인간을 천사도 악마도 아닌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이타심을 발휘하는 존재로 봤다. 흄에게 정의란 타인의 재산에 대한 존중과 계약의 준수 등 재산 및 계약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는 타인의 재산권 침해, 사기, 기만 등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3) 의지는 공평하게 주어졌다
모든 이의 삶을 반드시 공평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올림픽 시즌이면 모두 가슴 졸이며 경기를 지켜본다. 선수들은 금메달을 위해 4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연습에 몰두한다. 만약 1등 2등 구분 없이 모든 결과가 공평하게 평가된다면 그 누구도 노력과 열정을 그만큼 쏟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공평하기를 원하면서도 공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가 존재한다.


3.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인가
"가장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죽음, 그것은 길고 싸늘한 밤에 불과하다. 그리고 삶은 무더운 낮에 불과하다."
-하인리히 하이네

(1) 죽음이 두려운 까닭
어느 날 스승이 제자를 불렀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예'라고 대답하면 너를 몽둥이로 내칠 것이요, '아니요' 라고 말해도 몽둥이로 내리칠 것이요, 대답이 없어도 몽둥이로 내리칠 것이다."
제자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하릴없이 매질을 당한다.
이 이야기는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스승은 제자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고자 했을지 모른다. 
'살다 보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다가오면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을까?
그렇다. 만인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그것. 죽음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죽음 후에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2) 두려움을 삶의 에너지로 바꾸다
현명한 사람은 뒤를 돌아볼 줄 안다. 자신이 맞이하게 될 불이익이 무언지, 어디에서 위험이 닥쳐올지 헤아리고 판단하는 존재는 생존력이 높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생존력을 높여주는 것이다.

(3) 생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생각하라
역설적이지만 죽음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알면 삶의 의미도 알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삶에서만 찾으면 그 정수를 만날 수 없다. 빛을 이해하려고 그림자를 알아가듯 생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생각해보라. 죽음에 대한 이해가 우리를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 것이다.

(4) 죽음은 사건이 아닌 과정
인체는 죽어가는 세포와 새로 탄생하는 수많은 세포들로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암세포는 다르다. 암세포는 죽지 않기에 문제를 일으킨다.
삶도 죽음도 긴 여행을 향한 여정의 일부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화이트헤드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이며 모든 것은 과정이라고 말했다. 
죽음은 긴 여정 중의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받아들이라.


4.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가
"단연코 인생이 주는 최고의 상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서 온 힘을 다할 기회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1) 그가 천 억대 부자가 된 이유
마흔 살에 천 억원을 번 사람을 만났다. 그는 시원하게 그 비결을 밝혔다.
첫째, 약속을 지켜라
둘째, 신용을 얻어라
셋째, 거래하는 파트너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연구하라

일본의 어느 생선가게 주인은 매일 저녁식사는 무조건 외식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 메뉴는 항상 생선요리했다. 그는 식사 후 음식점 주인, 주방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방금 먹은 생선의 맛과 조리법, 음식 세팅에 관한 섬세한 조언을 들려주었다.  그도 앞서 말한 천억의 사람처럼 고객을 찾아가 고객이 부자가 되는 방법을 함께 연구하고 있었다. 그의 가게는 3년 만에 매출이 열배로 늘었다.

(2) 최후에 나를 기다린 한 가지
사람들은 가치 있는 삶을 말할 때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많이 성취했는가에 주목한다. 
30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소중한 것 열 가지를 써보라고 한 뒤, 시간을 주고 그중 세 개를 지우게 했다. 잠시 후 다시 세 개를 더 지우라고 했다. 이제 네 개가 남았다. 두 개를 더 지우라고 하자 표정들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난감한 얼굴들이다. 마지막으로 두 개가 남았을 때에도, 하나를 지우라고 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세 가지다. 절대자, 가족, 사랑이다.
이전까지는 멋진 차, 좋은 집, 여행, 직장 등 많았지만, 최후에 나를 기다린 단 한 가지는 결코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이었다. 
3천명이 '가장 소중한 것은 숫자로 환산될 수 없다'는 공통된 인식에 도달한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사람은 물질만으로는 살 수 없는 정신적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3) 미국이 몰랐던 '도'의 힘
최강의 군대를 가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졌다. 미국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로 했다. 
첫째, 일단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환산하기로 했다.
둘째,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은 옆으로 제쳐놓았다.
셋째,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넷째, 그것들은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바로 미국이 베트남에 패배한 이유다.
손자병법에서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도, 천, 지, 장, 법 다섯 가지인데 '도'는 군주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같은 뜻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는 자세를 말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도'를 알지 못했기에 패전했다. '도'라는 가치는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이다.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있는' 것에만 연연해 산다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4) 성찰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가?" 라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연이어 이렇게 말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어제 한 일을 무감하게 반복한다면 성찰이 없는 삶이다. 성찰한다는 것은 질문을 던지는 행위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치 있는 삶은 성찰하는 삶이다. 성찰하는 이는 객관적인 잣대나 산출된 숫자로 자신과 타인의 인생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가치를 위해 돈을 벌지만 가치를 위해 돈을 멀리할 줄도 안다.

(5) 줄을 감을 것인가, 풀 것인가
나의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 시점에서 하던 일을 다 그만두었을 때 내 손에 무엇이 남는지 질문해보는 것이다.
명품 바이올린을 보관할 때는 줄을 풀어놓아야 한다고 한다. 줄이 팽팽한 상태에서 장기간 보관하면 브리지가 휘거나 앞판이 주저앉게 된다. 당신은 줄을 풀고 있는가, 계속 감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당장 해답이 보이지 않아도 좌절하지 말고 질문 자체를 하라.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줄을 풀어주는 것이다.


5. 왜 그토록 행복을 갈망하는가
"행복을 수중에 넣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 그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복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일이다."
-존 스튜어트 밀

(1)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게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주관적이다. 그러나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은 다르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나의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건 원하는 것이지만, 노력할 생각이 없다면 그저 바라는 것이다.

(2) 행복을 정복하기 위하여
이 세상은 피할 수 있는 불행, 피할 수 없는 불행, 병, 갈등, 투쟁, 가난,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러셀은 이런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불행의 원인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이룰 수 없는 것을 원할 때 불행해진다. 또한 노력 없이 얻은 대가는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수주대토'. 한 번 찾아온 행운이 또 찾아올 거라 기대하며 정작 충실해야 할 농사를 등한시 한다. 반면 힘과 열정을 쏟은 뒤에 열매를 맺었다면 다음에도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둘째, 다른 사람하고 비교할 때 불행해진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감은 비교의 반대말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셋째, 쾌락을 탐하면 탐할수록 더 불행해진다. 한순간의 쾌락이 곧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쾌락을 행복과 동일시할 때 인간은 불행해지는 법이다. 이것은 쾌락의 역설이다. 모든 행복은 시선을 멀리 두고 나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에 있다. 인생 전체를 걸고 추구하는 긴 가치에 잇다.

(3) 행복과 쾌락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상하며 관조하는 데에서 오는 평온함인 유다이모니아를 지고의 행복이라고 보았다. 쾌락은 행복과 혼동하기 쉽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행복은 지속적이다. 쾌락은 떠나고 난 뒤 무료해지고 허무해지며 허탈감에 빠진다. 사람들은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며 자꾸 쾌락의 뒤를 좇는다. 

(4)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나라
과정과 결과 모두에 행복이 있다. 어떤 일을 즐기며 할 때도 행복하고, 결과로 성과를 거두었을 때도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인간의 삶 전체를 통해서 축적한 고결한 업적의 총 집합체" 라고 한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가장 행복한 상태는 자아가 실현될 때이다." 라고 말했다. 
자아가 실현될 때란 자기가 가진 모든 잠재력이 최고로 실현됐을 때를 가리킨다. 그는 자아가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이 인간의 삶이라고 말하며 인간은 그 과정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상태다. 타인의 불행은 나의 행복, 제로섬 게임이다. 
진정한 행복은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이루어진다. 자아를 크게 가지면 행복이 온다. 자아를 크게 가지면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며 불행에 쉽게 빠지는 일이 없다.


6.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1)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인생은 한번 뿐이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지난 날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건 삶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다.

(2) 후회란 나 자신을 거부하는 것
결혼한 사람은 얽매일 것 없는 싱글이 편해 보이고, 싱글은 결혼하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걸어온 길에 안착하지 못하고 가지 못한 길을 돌아본다. 자기 선택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며 고개를 젓는다. 후회란 결국 자신에 대한 거부다. 후회에는 자책과 자학이 동반된다.

(3) 낙타인가, 사자인가, 어린아이인가
니체는 인간 정신 발달에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했다. 
첫째, 낙타의 단계다. 낙타는 참을성이 많고 주인에게 절대 복종한다. 태양빛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워도 불평 하나 없이 앞에 가는 낙타의 뒤를 따라가기만 한다. 힘이 없고 소심한 탓에 반항은 하지 않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아니다. 낙타의 마음 속에는 르상티망,'원한 감정'이 쌓여간다.
둘째, 사자의 단계다. 혁명가다. 낙타 단계에 있다가 비로소 "No"를 외친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당하면 주인에게 달려들 만큼 용맹하다. 하지만 불안하고 고독하기 쉽다. 더불어 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똑똑해 보여도 결국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셋째, 어린아이 단계다. 니체는 어린아이 상태를 인간 성장의 최고점으로 보았다. 어린아이는 잘 잊어버린다.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긴다. 싸우다가도 금방 화해한다. 감정을 쌓아놓고 곱씹지 않는다. 인생을 포함하는 모든 것에 신성하게 YES 라고 말한다. 

니체는 과거를 잊으라고 말한다. 현실에 순수하게 예스를 보내며 웃음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난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해 반복적인 삶을 산다면 그 끝은 파멸을 향할 수 있다. 교훈을 얻었으면 과거는 과거인 채로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응시해야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다. 후회 없는 삶은 성숙한 응시에서 나온다. 
어떤 행동에 대한 후회를 다룰 때 영원 회귀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같은 삶을 살게 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데에는, 후회하지 않는 삶이라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현재의 삶을 누리겠노라는 적극적인 의지가 깃들어 있다.

(4) 니체의 망치를들고
망치로 세상의 가치를 깨어내고 나 자신만의 가치를 조각하는 것이 망치의 철학이다.
과거의 짐들, 부정적인 감정을 부수어야 한다. 니체의 망치를 든다는 것은 이제 현재의 삶에 충실하겠다는 결단이다.
어린아이처럼 살아라.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디엠! 당신의 손안에는 빛깔 좋은 사과가 있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


7. 일에서 어떻게 만족을 얻을 것인가
"만족을 찾아 헤매지 마라. 그보다는 항상 모든 일에서 만족을 발견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존 러스킨

(1) 돈보다 중요한 것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의 잠재력은 일을 통해서 계발된다. 자기계발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잘해낼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성장은 현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감옥에서 죄수가 받는 형벌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단순노동의 반복이라고 한다.

"저는 열심히 일해서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제 상사는 제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고 만족스러워했죠. 저는 분명 좋은 평가를 받아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될 겁니다.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본다면 저는 분명 행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말한 직원은 연봉이 억대지만, 자신이 한 일이 의미가 없다면 (상사가 발표할 준비 자료를 보고 잘했다고는 말해주지만 정작 발표는 다음에, 다음에... 하고 계속 미룬다면) 직장을 다니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사람이 돈 때문에만 일한다면 위 직원은 실망할 필요가 없다. 자료를 만드는 동안 높은 월급을 다 받았을 뿐 아니라 상사의 칭찬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반영돼 더 높은 연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돈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일한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비전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에서 성취감을 얻고 적절한 보상을 받게 해야 한다.

(2) 일,  취미, 전인적 인간
일과 취미는 어떻게 다를까? 
그 일을 했을 때 남이 나에게 돈을 지불하느냐의 여부가 기준이 된다. 온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은 취미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경제활동은 일이다. 따라서 취미이면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취미가 일이 되고 돈과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일은 돈과 연결되지만 단순한 취미는 돈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함과 동시에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일이다. 

(3)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주인은 노예의 인정(노예가 주인을 보면 허리를 굽히는)을 통해 주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확립한다. 즉 노예가 주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주인이 주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노예가 주인이 휘두르는 힘이 무서워서 형식적으로 복종하기는 쉽지만 주인은 진정한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기 때문에 고뇌에 빠진다. 그래서 주인은 노예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 된다. 이것이 독일 철학자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어느 퇴역 장성이 있었다. 늘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다녔던 그는 퇴직하자 외출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적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택시를 타려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택시마저도 탈 수 없었다. 누군가 택시 문을 열어주길 자기도 모르게 기다렸던 것이다. 이것은 노예의 노예가 된 극단적인 상황을 잘 묘사한다.

(4) 스스로 일을 하는 이유를 물어라
삶의 의미를 질문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자기 삶에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니체는 말했다.
"자신이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극복할 수 있다."


8.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의란 사람마다 그가 받을 만큼을 취하는 일이지, 개인이 타고난 불가 양도의 권리 실현을 무조건 주장하는 일은 아니다."
- 에리히 프롬

(1) 다른 카테고리는 다르게 대한다
플라톤은 정의란 자신의 몫을 각자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국가가 건강하고, 통합되어 안정되었다면 그 국가는 정의롭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으로, 평등한 사람은 평등하게 대해주고 불평등한 사람은 불평등하게 대해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만약 워터파크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백인들을 들여보내고 흑인을 들여보내지 않는 건 정의롭지 않은 것이다. 수영이나 물놀이랑 피부색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주인공 오셀로 역을 뽑을 때 백인과 흑인이 지원한다면, 백인 지원자들은 모두 탈락한다. 오셀로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흑인 주인공은 작품을 위해 처음부터 전제된 조건이다.
카테고리가 다를 때는 다르게 적용해야 된다는 의미다.

(2) 정의는 과연 모두를 위한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특정한 강자나 약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덕목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맞는 것처럼 보인다. 강자들은 법과 제도를 잘 안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할정도로 이익에 골몰할 경우 그 의도가 드러나고 종내 무너지고 만다.

(3) 강자가 살아가는 법, 라이온스 셰어
사자가 당나귀, 여우에게 제안을 했다. 셋이서 협동하여 사냥감을 잡는 것이다. 
그리고 그 셋은 잘 협력하여 사냥감을 잡았다. 그리고 사자가 물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나눠 먹으면 좋을까?"
당나귀는 셋이 힙을 합쳐 잡았으니 셋으로 나눠 먹자고 천진하게 말한다. 대답을 들은 사자는 당나귀를 죽인다.
그런 여우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여우는 자기는 뒷다리 하나면 충분하니 나머지는 사자 몫이라고 말한다. 사자는 큰소리로 웃는다
"너 참 똑똑하구나! 그런 건 언제 배웠니?"  그리고 여우는 대답한다.
"조금 전에."
이것이 라이온스 셰어 에피소드다.
현실에서 보자면 기업이 평소엔 이미지 관리를 하다가 매출이 급감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고객에게 그 부담을 떠넘기는 모습. 이것이 라이온스 셰어다.

(4) 정의가 무너지면 모두가 패배한다.
니체는 정의는 강자를 위한 것이라며 약자로부터 강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가 생각하는 강자는자신의 노예근성, 거지근성, 나약함을 극복하는강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약자들을 배려하고 동정할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보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손자병법의 손자는 정의를 이렇게 말한다. 
"법 위에 사람 없고, 법 아래 사람 없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
이 말은 그가 오나라의 왕 합려가 궁녀 180명을 줄 테니 직접 군대로 지휘해보라며 지시한 일화에서 나온다. 이 일화에서 손자는 왕이 지극히 아끼는 궁녀 두 명을 참수했다. 처음엔 그냥 히히덕 거리며 웃기만 하던 궁녀들이 그 두 명이 참수되는 걸 보고 진지하게 제식훈련에 열중했다.
정의란 강자와 약자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정의가 무너지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패배자가 된다. 약자의 이익을 무시하면 그 집단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 나아가 모두의 이익이 줄어든다. 강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정의를 주장하면 이는 결국 스스로의 이익을 망친다. 특정인을 위한 정의가 아닌 모두를 위한 정의일 때 사회에 이익과 행복이 찾아온다.


9. 피자를 나누는 가장 정의로운 방법은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야만 한다."
-디어도어 루빈

(1) 갈등의 씨앗, 분배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 역할을 맡고 협동하며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그 부가가치를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따라 전쟁이 있고 태평성대가 있었다. 지속적으로 협동하기 위해서는 결과물이 정의롭게 분배되어야 한다.

(2) 마지막 피자 조각은 누구에게
인간은 정의로운 세상에서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 한(恨)이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서러움이 응축된 감정이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억눌린 채 살아가며 어디에도 풀지 못하는 약자들의 감정이 바로 한이다. 정의로운 분배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도출할 것인가, 이것이 언제나 핵심적인 문제였다.
정의로운 분배란 언뜻 모든 사람이 평등한 몫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존 롤스의 정의론은 조금 다르다. 
평등한 분배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분배가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즉 30 / 30 / 30 으로 세 명에게 정확히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보다는,
40/ 50/ 70 으로 분배할 수 있다면 비록 불평등하지만 더 정의로운 분배라고 보았다. 
이것이 최대 수혜자가 자신의 것을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차등 원칙이다.

(3) 무지의 장막 뒤에 서라
프랑스 경영 컨설턴트 이브 모리악은 "단순한 여섯 법칙"이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가정을 한다. 
A, B, C, D 라는 네 부서가 있다. 니 부서는 서로 유리한 사업을 맡으려 해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럴 때 리더는 "각 부서에 일을 나누는 방식에 대해서 네 명이 합의를 해오시오. 그러면 내가 그 방식에 따를 텐데, 당신들 네 사람을 어느 부서에 부서장으로 임명할지는 내가 알아서 정하겠소." 라고 말하면 된다.
왜냐하면 부서장 네 사람은 자기가 어느 부서의 부서장이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느 부서 하나 불리하게 만들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지의 장막을 활용한 정의롭게 일을 배분하는 방법이다.

(4)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획득물에 대한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약속과 실현이다. 이것이 집단, 공동체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게 한다. 지속 가능한 생존이 이루어지려면 분배 정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5) 정의로운 분배가 필요한 이유
지속적인 협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협동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수긍, 납득할 수 있는 몫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협동의 결과물에 대해서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적극적인 협동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정의로운 분배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있으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10. 열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일 것인가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 체 게바라

(1) 죽일 것인가, 죽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아프리카 어떤 족장이 자기 영토에 무단 침입했다며 여행객 열한 명을 잡아 사형대로 올렸다. 그리고 이 족장에게 초대를 받은 저명한 식물학자가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놀란다. 아무리 봐도 이 여행객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족장을 말렸지만 족장은 선택지를 주었다.
"정 그리 말하니 선택권을 주겠소. 저 중 한 명을 당신 손으로 총살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풀어주겠소."
다른 방법은 없어보인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경우도 있다.
당신이 기차의 기관사인데, 저 멀리 10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는 버스가 놓여있다. 이대로 기차가 달리다간 10명이 모두 죽는다. 그런데 조금 앞에 선로를 바꿀 수 있는 길이 있다. 당신은 선로를 바꿀 수 있지만 이 경우 그 선로 위에 있는 무고한 사람 1명을 죽이게 된다.
만약 당신이 1명을 죽인다는 선택을 내린다면, 만약 그 1명이 당신의 가족이어도 그럴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10명을 죽인다는 선택을 내린다면, 그것이 10명이 아니라 1,000명이어도 그러겠는가?

의무론자들은 족장이 선택권을 주어도 죄책감으로 살인할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결과주의론자들은 한 명을 죽이고 열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총을 쏠 것이다. 

의무론자들은 "내 손으로 죽였느냐, 죽이지 않았느냐" 즉 죽이는 것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다르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 명이든 열 명이든 죽음은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기차의 방향을 틀어 희생되는 한 명은 원래는 죽을 일이 없던 사람이다. 따라서 열 명이든 천 명이든 기차는 원래 그대로 가야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반면 공리주의자들은 죽이는 것과 죽게 내버려두는 것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열 명을 살리기 위해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한 명을 의도적으로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이라 믿는다.

(2) 테러범을 잡기 위해 인질을 희생시킬 것인가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과 협상한 형국이 되고, 향후 테러가 남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다. 
특수 부대 10명이 적진에 침입했다가 고무보트를 타고 탈출 하는 도중, 한 명이 실수로 툭 떨어진다. 추격대가 바짝 좇아오고 있기에 이 대원을 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간 10명이 모두 죽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특수 부대원들이 부여받은 원칙은 '전우를 두고 오지 않는다' 다. 더욱이 팀원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훈련받았다.
딜레마가 혼재된 이런 상황에서 최상의 선택은 존재할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3)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지 말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행복해져야 하는 제로섬zero-sum 관계도 있고, 
반대로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한 포지티브 섬 positive sum 관계도 있다.
공리주의는 포지티브 섬의 관계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전체의 합이 마이너스가 되는가 아닌가를 매우 중요시했다.
부자에게 1억만은 빼앗는 다면 부자에게는 마이너스다. 하지만 그거보다는, 이것을 천 만원으로 나누어 가난한 사람들 10명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10명이 느끼는 행복이 부자의 마이너스를 훨씬 웃돈다.

소방대 구조대원들이 지니는 제1원칙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이다.
'몸을 던져 사람을 구하라'가 아니라 뜻밖인가? 하지만 자기 스스로를 위험에 빠드려 더 큰 위험에 처해 구조 활동을 할 수 없으면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게 된다. 또 동료들이 자기를 구조해야 하므로 역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기회가 줄어든다. 그렇기에 영웅적인 구조 활동을 벌이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우선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윤리는 무한한 희생을 요구하는 덕목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희생을 하긴 하되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스스로를 추스른 뒤에 행동해야 한다.

(4)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 사이
전쟁 상황이다. 한밤중 탱크가 쳐들어온다. 나는 보초를 서는 군인이다. 탱크를 향해 발포하려는 순간, 포신에 매달려 소리치는 사람이 보인다. 나의 어머니다. 내가 탱크를 박살내면 내 어머니도 같이 죽는다. 내가 발포하지 못하면 후방에 잠든 동료 1,000명이 죽는다. 
공리주의는 소수를 희생하더라도 다수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다. 그것의 희생자가 친구나 어머니일지라도. 공리주의자는 행위자의 중립적인 선택을 요구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 도덕률에서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마저 희생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그 희생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총량을 증대하지 않는다면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딜레마가 너무 비현실적인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딜레마를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만약 당신의 인생에 딜레마가 없다면 그것은 이 사회의 일그러진 초상을 직시하지 않는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11. 법은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있는가
"용기란 정의가 수반되지 않는 한 무가치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정의로워지면 용기는 불필요해진다."
- 아게실라오스 2세

(1) 지배자나 정치 세력에 따라 달라지는 법
법이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있는가에 답하기 위해선 이렇게 물어봐야한다.
"법에서 허용하는 것은 모두 옳고, 금지하는 것은 모두 그른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말하기엔 세상과 법 사이에 모순이 많다. 세상엔 악법도 존재한다.

(2) 악법도 지켜야 하는가
법에는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다.
1) 법은 모든 것을 일일이 규제할 만큼 세분화 되어 있지 않다.
2) 법 제정자는 스스로 만든 법에 의해 규제를 받아야 하는가 받지 말아야 하는가? 실제 집행에서 정치 경제 권력층과 똑같은 법 적용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3) 법은 현실을 앞서갈 수 없다. 법은 현실을 뒤따라가기에 그 사이 악법이 존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간통죄다.

(3) 옳고 그름에 대한 여러 관점들
옳고 그름, 정의, 선과 악을 정의할 수 있는가?
관점주의 철학 니체는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관점주의다. 니체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관점의 해석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말한다.

객관주의는 각자 주관적 인식과 관계없이 옳고 그름은 주어져 있다는 입장이다. 플라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는 영원한 보편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펜 한 자루가 있다고 하자. 또 다른 형태의 펜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펜을 총칭해 부르는 '펜' 이라는 이데아가 존재한다. 의자, 책상, 나무 등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가 보편자인 이데아를 가진다면 세상은 보편자들로 넘쳐날 것이다.
플라톤은 많은 선들 중에서도 '옳음'의 이데아가 있다고 말한다. 

간주관주의는 관점주의와 객간주의도 아니다. 일단 이것은 주관주의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고 있지만, 역지사지를 통해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성을 통해 합의가 가능하고 이 과정에서 추출한 것을 옳다고 정의 내릴 수 있다는 입장이다. 로크, 홉스, 루소, 칸트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의 이론이다. 이들에 따르면 옳은 것이란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합의하여 계약 맺는 상태를 의미한다.

(4) 자연법이냐 실정법이냐
실정법은 일반적 의미의 법으로 현실적으로 행해지는 성문화된 법을 말하며, 한계가 있기에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없다. 시대나 변화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자연법은 영구불변의 보편적 질서나 보편적 기준을 이른다. 자연의 질서, 인간의 이성에 근거를 둔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법이기에 변함이 없다. 자연스러운 것은 옳은 것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자연법의 핵심이다. 인간은 이성으로 자연에 내재된 자연법들을 알게 된다. 인간은 법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법도 시대나 사회 변화에 영향을 전혀 안 받는 것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시험관 아기나 생명연장 시술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한때 가톨릭에서도 강한 반대의 뜻을 표명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전하고 생명을 해석하는 관점 또한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실정법은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세상에서 질서를 잡아주는 표지판 역할을 한다. 표지판에 가끔 오탈자가 잇다고 해서, 어쩌다 잘못된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표지판을 없앨 수는 없다. 악법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법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법의 가치를 존중하되 악법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실정법이 최종적인 해법이라고 단언해서는 안 될 일이다.


12. 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참다운 자선이란 보답에 대한 생각 없이 타인에게 유용함을 주려는 욕망이다."
-스베덴보리 

(1) 당신은 베푸는 사람인가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는 인간형을 matcher, taker, giver로 분류했다.
매처는 받는 만큼 되돌려주는 사람이고
테이커는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고
기버는 자신의 이익보다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여 때로는 손해를 보는 것도 감수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부, 권력, 명예를 고려해 사회를 상, 중, 하 세 단위로 나눴다.
중간층에는 매처와 테이커가 분포했다.
상층부에는 기버들이 있었다.
그리고 하층부에도 기버들이 있었다.
왜 매처와 테이커는 상층부에 진입하지 못하고, 기버들이 상층부와 하층부에 동떨어져 분포할까?

테이커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취하고,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되갚을 기회를 노린다. 테이커가 상층부로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 피해자들이 발목을 잡는다.
매처가 올라가려 할 때에는 앞장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기버는 거래를 할 수록 소문이 퍼져 거래가 늘어나고 마침내 상층부에 진입하게 된다.
그럼 하층부 기버들은? 이들은 대책없이 주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보증 서달라면 도장을 기꺼이 찍어주는. 
상층부 기버들은 '1년 100시간 봉사활동', '매년 수입의 5퍼센트 기부' 등으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인다. 
참고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을 돕는 위장된 테이커들은 때가 되면 추락한다. 가식적인 선의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2) 이타적 행위의 진짜 동기
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1) 순수한 이타주의 :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심지어 불이익을 당해도 남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 
2) 일반적 이타주의 : 남을 도우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돌아오기에 나를 생각해서라도 남을 돕는다는 입장.

도움을 받는 사람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봉사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이 커지는데, 1년 100시간대에 이르면 최고조에 오른다. 하지만 100시간이 넘어가면 행복의 강도가 더 이상 오르지 않고, 700시간이 넘게 지나치게 봉사활동을 하면 오히려 행복감이 감소한다. 일상이 침해받기 때문이다.

칸트주의자들인 순수한 의미의 이타주의를 말한다. 그것이 선한 행동이기 때문에 그자체로 하고 싶은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남을 도와줘서 그가 잘되고, 그로 인해 내가 잘되어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이 이루어지면 언제나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봤다.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내가 거지에게 돈을 주는 건 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받고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내 자신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비를 받는 사람보다 베푸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기에.

(3) 도움에도 적절한 시기와 방법이 필요하다
아프리카에 영양 실조, 간단한 치료조차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돈을 기부하여 그들을 돕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렇게 단순할까?

식량과 약품을 원조해주면 확실히 사망률이 현저하게 감소한다. 그런데 사망률이 급감하면 인구가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워낙 출생률이 높아 신생아 생존도 힘든데 거두고 먹여야 할 아이들의 숫자가 증가하니 진퇴양난이다. 일시적인 원조가 오히려 더 큰 숙제를 남기는 셈이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살려내려니 자원은 부족하다. 얼마나 슬픈 딜레마인가.

빈민 구제가 오히려 의존적 성향을 강화시킨다고 보고 진정 그들을 위한다면 돕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심지어 극단적 이기주의만이 세상을 이끄는 힘이라며 기부 행위를 나약한 자들의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철학자도 있다. 그녀의 이름은 Ayn Rand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돈이란 모든 인간이 정신과 노력의 주인이라는 규범에 근거한 것"
그녀는 정직한 사람이란 "내가 생산한 것 이상으로 소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한비자에는 '무너진 담장' 이야기가 나온다.
한 노인이 옆집 주인에게 '비가 많이 오는데, 이러면 담장이 무너질 수 있고 담장이 무너지면 도둑이 들기 쉽다네' 라고 말했다. 주인은 괜찮다며 무시했지만 다음날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노인을 의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노인은 도둑이 들기 쉽다고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담장이 무너진다고 까지만 말했어야 했다.
한비자는 무지한 상대를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화를 자초한다고 말한 것이다.

누군가를 도울 땐 먼저 상대방이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그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에 맞추어야 한다. 이보다 앞서나가면 오히려 선의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혹시 우리는 상대가 원치도 않는데 내 기분과 의리를 앞세워 도움을 자청하고 있진 않은가?
자녀를 양육할 때도 '다 너를 위한 일이다' 라는 명분으로 아이를 좌지우지하진 않는가?
이런 것들은 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4) 도움을 줄 때는 인정 욕구를 버려라
사람에게는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는 인정투쟁의 역사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인정투쟁은 주체로 인정 받으려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상호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최근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 활발하다. 연탄을 나르느라 까매진 CEO의 얼굴이나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임원진의 모습이 언론에 노출된다. 그런데 환한 얼굴과 어색한 몸짓이 어쩐지 홍보용 사진처럼 보인다.
아무리 뛰어난 사진작가라도 진정성 마저 꾸며낼 수는 없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다가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다.

우리는 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하는가? 
어려운 사람이기에 도와야 하는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고 부정할 수 없기에 도와야한다. 


13.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한가
"생물학적으로 고찰하면 인간은 가장 무서운 맹수이고 또한 같은 종족을 조직적으로 먹이로 삼는 유일한 맹수다"
- W. 제임스

(1) 맞춤아기의 딜레마
한 부부는 첫째가 희귀 빈혈증으로 골수이식을 받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다. 이 골수이식을 위해 부부는 둘재를 낳았다. 그런데 이 아기는 시험관 수정 기술을 통해서 정상적인 배아만을 골라 탄생시키는 맞춤아기다. 부부는 이 방법으로 둘째를 출산했고 골수 이식 수술로 첫째도 살렸다. 그런데 이 결정은 윤리적인가?
아픈 형제 자매와 조직형이 일치되지 않으면 수정란은 폐기되는, 생명을 살리자는 취지 안에서 생명이 취사선택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다.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일까?
일반적으로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행위는 비윤리적이라 간주된다. 그런 까닭에 노예나 인신매매는 가장 비인간적 행위로 비난받는다. 칸트주의자들은 아무리 좋은 결과가 있더라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고 했다. 

(2) 사랑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신학자 조셉 플레처는 무엇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을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만이 항상 선한 것이고 사랑은 그 수단을 정당화한다. 사랑을 떠나서는 무엇도 절대적 가치나 구속력을 갖는 법이 되지 못한다는 상황윤리를 주장했다. 
윤리적 가치들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다.
즉, 맞춤아기의 딜레마에 있어서, 부모는 아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낳은 맞춤아기 사건은 윤리적인 것이다. 그들의 선택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3) 결혼은 삶의 수단인가 사랑의 선택인가
한비자를 보면, 아버지가 딸에게 충고한다. 
"아무도 모르게 재산을 챙겨 놓아라. 남의 집 며느리가 된 여자들은 부지기수로 이혼당한다.  틈틈이 네 것을 챙겨라."
딸은 아버지 말에 따라 기회 닿는 대로 재물을 챙긴다. 며느리가 들어온 이후 금고가 비어가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시어머니는 예의주시하다 결국 며느리를 현장에서 붙잡고 내쫓는다.  그러자 아버지가 하는 말,
"내가 뭐라 그러더냐? 너를 쫓아낼 수 있다고 했지? 챙겨놓길 정말 잘했다."
사람과 자리를 모두 수단으로만 여기는 세태를 비판한 이야기다. 부녀는 결혼을 재물 축재의 수단으로 여겼을 뿐이다.

중매는 양쪽의 조건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결혼정보업체는 사람을 등급에 따라 매기고 사람을 상품화한다. 물론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나 잘 사는 부부도 있다. 그러나 배우자감을 선택할 때 조건부터 점검했기에 조건이 맞지 않거나 훗날 조건이 달라질 경우 결혼이 유지되기 힘든 경우가 많다.

(4) 스펙 쌓기, 누구를 탓할 것인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대해 조금 더 민감하고 엄격해질 필요가있다.
기업은 사원을 뽑을 때 스펙을 주요 기준으로 판단한다.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부도덕한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이며 젊은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다.


14. 탐욕을 부리면 왜 안 되는가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 미셸 몽테뉴

(1) 그 보너스는 정당한가
사람들이 집을 산다.
은행에서 대출 받아 이자를 내가면서 집을 마련한다.
좋은 집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투자 목적이 더 크다. 
그리고 마법처럼 집값이 뛰어오른다. 
대출받아 구입한 집값이 올라 대출을 갚는 게 아니라 그 집을 팔고 더 큰 집으로 옮겨 간다. 물론 더 큰 빚을 진다.
대출 건수가 많아져 은행도 이윤이 늘어난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런 불꽃놀이 축제는 끝나고 상황이 거꾸로 돌아간다.
집값은 바닥을 누르고 추락하며 원금보다 더 떨어진다.
부풀어 올랐던 거품이 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대재앙이 닥친다.
이 간단한 설명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말해준다.

당시 AIG 보험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했다. 이 회사는 너무 거대했기에 이 회사가 그냥 망하는 걸 보기엔 그 회사에 돈을 맡긴 수많은 고객들의 돈이 공중분해되는 것이고, 이것은 엄청난 경제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정부는 울며겨자먹기로 막대한 공적자금 투입하여 이 회사를 살렸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는 위기를 자초한 임직원들에게 상당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세금으로 사기업의 임직원에게 거대한 보너스를 지급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실패한 경영자는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찬성하는 사람들은 보너스에 대한 약속은 위기 이전에 이미 정해졌고, 보너스 대상에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투입된 인력들도 많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2) 탐욕의 정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전 세계가 월 스트리트를 비난했다.
몇몇은 마지못해 수긍했지만 대부분 월가 금융인들은 자신의 탐욕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고 이번에는 운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탐욕의 진짜 문제는 자신이 탐욕스럽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데 있다. 남의 탐욕은 잘 보지만 정작 자신의 탐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 탐욕을 부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신이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것을 추구하면 탐욕이다." 라고 대부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꿈은? 꿈은 크게 가지도록 권장되지 않는가? 꿈은 높은 목표와 같은 말이다. 저 높은 곳에 세워놓은 목표를 따른다고 해서 모두 탐욕스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 탐욕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 누가 좋아하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만약 그 목표가 이루어지고 나만(또는 아주 한정적인 나의 주변인들만) 좋다는 답이 나온다면 그것은 탐욕을 부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욕심, 그것이 탐욕이다.

(3) 탐욕과 쾌락, 절제와 추구 차이
고대에 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놓고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충돌했다.

스토아학파는 욕망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 했다. 쾌락은 추구하면 할수록 더한 것을 원하게 되니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주장했다. 욕망이 불행의 근원이다. 소금물을 들이키면 갈증이 더해지듯, 가지게 되면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것이 욕망의 법칙 곧 탐욕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콰락은 감각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 쾌락이다. 안심입명의 경지가 행복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차분하게 만드는 쾌락은 육체적 쾌락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립시킬 필요 없이, 이 두 학파를 나란히 두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탐욕을 절제하고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면 된다.

(4) 함께할 친구와 밧줄이 필요하다
쌀이 가득 찬 독이 있었다. 쥐는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먹으면 일 년은 포식하리라 여기며 황홀하게 먹이를 탐한다. 먹어도 먹어도 쌀은 넘친다. 그렇게 한참을 배 부르게 있다가 문득 머리 위를 보니 항아리 입구가 하늘에 닿아 있다. 펄쩍 뛰어보지만 소용 없다. 쥐는 그제야 탄식한다. 누구도 등을 떠밀지 않았다. 제 발로 독 안에 들어가 세상에서 가장 잡기 쉬운 쥐가 되어버렸다. 쥐는 스스로의 탐욕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의 목표에 반드시 타인의 행복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어떤 조직의 목표가 구성원들의 편의와 행복만을 위해 설정되었다면 이는 탐욕스러운 조직이다. 더불어 살기 위한 목표, 더불어 행복하기 위한 목표야말로 당신 스스로를, 당신이 속한 조직을 살려줄 수 있는 밧줄이다.

(5) 세상이 문제인가, 나의 욕심이 문제인가
어떤 개가 있다. 개의 입에는 제법 맛있어 보이는 생선이 물려있다. 개는 다리를 걷다가 물 위에 또 다른 물고기가 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생선이 탐이 났던 개는 그마저 낚아채려고 입을 쩍 벌린다. 그 순간 자신의 입에 있던 생선이 물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 후에야 개는 물 위의 생선이 자기가 물고 있던 생선이 비친 형상임을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린 다음번엔 다리에서 생선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생선을 빠뜨리고 난 뒤에도 왜 빠진 줄 알기는 알까? 자신의 탐욕이 불행을 자초했는데도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그때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
"일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이렇게 세상 탓, 남 탓 하는 사람은 발전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놓치고 있는 사실 조차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고 확신하기에 불행의 원인을 타인이나 환경 탓으로 돌린다. 그러니 다음에도 일이 잘못될 확률이 매우 높다. 


15. 모든 것이 결정된 세계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인간이란 자기의 운명을 지배하는 자유로운 자를 말한다."
- 칼 마르크스

(1) 나는 이렇게 되게끔 정해져 있었나?
결정론자는 나의 선택에 의해 다음 일들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며 자기 현실에 대한 인과관계를 탐색한다.
숙명론자는 나는 처음부터 게임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시험을 잘 못 보게 정해져 있다고 치부한다.

(2) 모든 원인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
결정론은 다시 '결정론'과 '자유론'으로 분류된다.
자유란 自由, 자기로부터 말미암다, 즉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하느님은 미래를 다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산 위에 올라가보라. 저 아래 길을 걷는 한 사람의 나그네가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가 이윽고 어느 비탈을 지나 어느 굽이를 돌게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

(3)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는 힘
"주역" 에서는 세계는 순환하며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변한다고 보고 잇다. 
천 년 가는 왕조 없이, 결국 부패하고 침체하여 다시 궁하게 되면 변하고자 하고, 해법이 나와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또다시 궁해진다. 이것이 반복된다.

경제학자 카를 멩거는 "이 세상에 범죄자는 없다. 오직 치료받을 환자만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범죄자는 사회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죄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범죄자 역시 환자이고 죄의 원인이 환경이라 한다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이것은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16. 왜 역지사지가 필요한가
"나는 사람의 행동을 경멸하거나, 탄식하거나, 비웃지 않고 그저그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 스피노자

(1) 생각의 전환이 가져오는 변화
마태복음 7장 12절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논어
"남이 너에게 하면 싫은 것을 너도 남에게 하지 말아라"

전자는 적극적 황금률, 후자는 소극적 황금률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음식 먹는 광경.
사람들이 자신의 팔 길이보다 더 긴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데 지옥에서는 자기만 먼저 먹으려고 하다보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아 아수라장이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긴 젓가락이라 해도 문제가 없다. 음식을 서로 먹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는 그 사람한테 떠먹여주는데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면 나는 뭐가 됩니까" 라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하지만 미국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대개 회사는 자기 할 일만으로 바빠 다른 사람이나 다른 부서의 업무 협조에 적극적이지 않고 귀찮아 하는 것이 다반사다.
어떤 회사는 자기 것만 챙기느라 급급한 부서 간 이기주의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사장은 특단의 조치를 했다.
"다른 부서에서 협조 온 사안에 대해서 자기 부서 업무에 우선해서 처리하시오."
그러자 어떻게 되었을까?
서로 다른 사람 입에 먼저 떠먹여주기 시작했다. 각 부서장들도
"다른 부서원이 업무 협조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기 업무에 우선하여 처리하시오" 라고 공지했다.
이렇게 되다보니 조직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었다.
생각 하나가 조직을 바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성원이 바뀌어야 조직이 변화한다고 말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와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조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2) 입장을 바꿔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장은 이들을 데리고 3차까지 회식을 이끌고 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정작 직원들은 피곤하다. 차라리 보너스가 더 반가웠을지 모른다.
아전인수 격인 역지사지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다.

니체는 인간은 자기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개개인의 해석에 따라 수많은 입장과 전망이 있다는 니체의 관점주의는 역지사지의 맹점을 지적한다. 아무리 상대의 입장이 되어본다고 한들 자신의 관점을 넘어설 수 없다는 의미다. 

칸트도 황금률을 비판한다. 황금률에 의하면 범죄자가 황금률 법칙을 내세우며 판사에게 형량을 낮추어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스스로를 상대방의 입장과 바꾸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봤다.
황금률을 가지고는 인간의 옳고 그름에 관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3) 먼저 다가가고 먼저 인정하라.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의 안쪽에만 달려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의 문을 밖에서 억지로 열려고 하면 문이 부서질 뿐이다. 다른 사람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은 딱 하나, 내 마음의 문을 그 사람을 향해 먼저 여는 것이다.
신뢰의 법칙.
"남에게 신뢰받고 싶은 만큼 남을 먼저 신뢰하라."
리더는 부하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부하도 리더에게 다가간다. 
물론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인정할 때 항상 리스크는 있다. 그러나 이 두려움에 벗어나는 것이 리더십이다.


17. 용서는 왜,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용서의 엄청난 혜택은, 용서를 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므로, 용서는 매우 이기적인 행동이다."
- 라와나 블랙웰

(1) 용서 없는 관계의 결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생전에 전하지 못해 후회하는 네 가지 말.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합니다"

놀랍게도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닌 용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당신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이제는 매듭을 풀자고 전하지 못한 이 말이 가슴에 깊이 남는다고 한다.

우리는 왜 용서를 해야할까?
1)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건 영원히 그 사람들과 함께 감옥에 묶여 있겠다는 것이다.

2) 과거사를 매듭 짓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복수는 평화를 부를 수 없다.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에서 여우는 두루미의 부리로는 먹기 힘든 평평한 그릇에 수프를 대접하여 앙갚음을 하였다. 그러지 말고 후하게 대접했다면 두루미는 크게 깨달아 여우를 진정한 친구로 삼게 되었을 것이다. 용서의 너그러움이 없다면 질시하고 반목하며 감정이 고인다.

3)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용서를 해야 한다.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노력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만 전쟁을 준비하라고 홉스가 말했다.
상대방의 의도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일단은 선의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용서하는 이의 열린 태도다. 두루미는 물고기가 담긴 병목이 긴 물병을 대접 했을 때, 이것은 일부러 여우를 골탕먹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우는 자기 기분만 나쁘다고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복수를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주라 해도 함부로 권력을 휘둘러 누군가를 불구대천지원수로 만드는 행위는 삼가라 했다. 갈등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종결된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결국 폭력에 이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그리고 그 희생은 또 다른 폭력과 희생으로 이어진다.

(2) 누구를 위해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용서의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1) 사과하면 용서해준다
2) 사과해도 용서하지 않는다
3) 사과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다
4) 사과하지 않아도 용서한다

용서 근본정신은 당연히 네 번째다.
그외 용서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팃포탯' 전략을 제안한다.
한 번은 용서해주고 두 번 하면 그때 보복하라는 것이다.

용서는 강자가 먼저 하는 것이고, 먼저 해야 한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도, 상대를 위해서도 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하기에 누구나 실수를 한다. 
용서하지 않으면 실수에 대한 대책도 사라지고 끝없는 투쟁만이 이어진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는다고 했다. 
나라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 험한 세상, 더불어 살아가야 희망이 있다.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의 과오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고 종국엔 파멸만 남아 있다.


18. 엿듣기와 엿보기는 늘 나쁜 일인가
"사색을 할 동안 인간은 신과 같이 된다. 행동과 욕망에서는 환경의 노예일 뿐이다."
- 월리엄 러셀

(1) 훔쳐보기와 부끄러움
어느 날 엄마가 아이의 일기장을 훔쳐본다. 아이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죽고싶다고 일기장에 써놨다.
아이에게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한 어머니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행동은 부끄러운 일일까?

우리는 내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 관찰의 대상이 될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 타인에게 단지 보이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나누어 보았다.
즉자적 존재는 의식할 수 없는 무생물 같은 존재다. 의식이 없으므로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도 없고 삶의 환경에 대해 자유를 행사할 수도 없다.
대자적 존재는 의식이 있는 존재다. 인간은 대자적 존재다.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의식을 지닌 존재다.

방안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대자적 존재지만 내가 몰래 훔쳐보고 잇다면 그는 즉자적 존재가 된다. 누군가를 훔쳐본다는 것은 의식이 있는 누군가를 대자적 존재에서 즉자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이때 존재 관계는 평등 관계가 아닌 상하 관계가 된다. 
훔쳐보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누군가를 대자적 존재에서 즉자적 존재로 낮춰보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엿보기와 엿듣기의 핵심적 문제는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동의를 구한다는 것은 본인을 주인공으로 대우한다는 뜻으로, 칸트가 말한 자율성에 준한 태도다. 
아들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는다면 불행을 막을 유일한 통로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럼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3) 누구를, 무엇을 위한 염탐인가
공인에 대한 엿보기는 여전히 논란 중인 문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원의원 게리 하트의 사생활을 카메라로 엿보았던 기자의 행동은 정의의 발로인가, 사생활 침해인가. 한 정치인의 부도덕한 가면을 벗겨(게리 하트는 가정이 있음에도 젊은 여성과 혼외  관계에 있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 것인가.

(4) 감시자가 보이지 않는 감옥
동물원의 동물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살아가며 인공적인 환경에 구속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한 동물원에서 동물원 우리를 특별하게 설계했다. 밖에서 사람은 동물을 볼 수 있지만 안에 있는 동물은 밖에 사람을 보지 못한다. 이 결과 스트레스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 동물들은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시선에서 자유로워지자 동물들이 방만하게 짝짓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을 찾았던 부모들은 항의했다.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콘(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은 감시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이었다. 가장 적은 비용(최소 숫자의 간수)을 고려한 감옥이다. 죄수도 일일이 간수와 눈을 마주칠 필요 없어(감시 당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 만족한다.

(5) 나는 나의 결정적 목격자다
실제로 파놉티콘은 오늘 날의 CCTV 형태로 적용되었다. 골목길, 엘리베이터, 공원 어디에도 사생활은 없다. CCTV는 범죄로부터 지켜주지만 우리를 감시하기도 한다. 물론, 공공장소인 경우에는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개인의 창문, 침실이 보이는 방향은 피하며 반드시 주민의 동의를 구한 뒤 설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동의 없는 엿보기나 엿듣기는 옳지는 않지만 절대 허용될 수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CCTV가 나의 사생활을 침해하지만 범인을 찾아내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듯,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아들을 지켜줄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신독愼獨, 공자가 말했듯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가야 하는 정신이다.

19.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가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 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 니체

(1) 절대적인가 잠정적인가
미생지신 이라는 것은 융통성 없이 약속만을 굳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남자가 여인과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하지만 기다려도 여인은 오지 않았고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개울물이 급격히 불어나 남자는 물에 잠긴다. 남자는 교각을 끌어안은 채 온몸이 잠겨 끝내 숨지고 만다.

누군가는 이 미생지신을 들며 신의를 강조한다.
장자는 쓸데없는 명분에 빠져 소중한 목숨을 가벼이 여겼다며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라고 통박했다.

한 어린 소년이 도산 안창호 선생을 찾아온다. 이 소년은 돈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청한다. 도산은 도와주고 싶었지만 수중에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자금을 마련해 집으로 갖다주겠다고 약속하고 소년을 보낸다. 며칠후 도산은 약속한 돈을 들고 소년의 집을 찾아가는데, 이 날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켰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제의 검거를 피해 몸을 숨겼지만 도산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내에 나타났다. 도산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약속을 지켰으나 결국 잡히고 만다.
그는 국가 독립이라는 큰 대의를 도모해야 할 사람이었는데 작은 약속을 지키느라 본분을 저버린 것은 아닌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공리주의자들은 더 크고 숭고한 목적을 위해 작고 사소한 약속을 깨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칸트같은 의무론자들은 약속이란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신의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노력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2) 한쪽에 해가 되는 약속이라면
내가 약속을 지키면 상대방이 오히려 더 큰 해를 입는다면, 이때도 그 약속을 지켜야하는가?

그리스 신화에 나온 파에톤 이야기다. 그는 태양마차를 모는 아버지가 있다. 파에톤은 자기 아버지가 태양 마차를 몬다며 친구에게 자랑했지만 친구는 거짓말이라며 비웃는다.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가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이 진짜라면 소원하나를 들어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아들은 태양마차를 혼자서 몰게 해달라고 말했다. 태양마차는 헬리오스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들과의 약속을 지켰고, 그 결과 아들은 죽었다. 약속을 지키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들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상대방에게 해가 돌아갈 경우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보통 약속이 파기되는 건 약속을 깨는 것이 그 파기하는 사람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파기하는 당하는 사람(만)이 이익을 볼 수 있다면 약속은 파기시킬 수 있다고 봤다. 물론 공리주의자들도 여기에는 당연히 찬성할 것이다. 칸트주의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약속이라며 반대하겠지만.

(3) 부정적 기억은 힘이 세다
"파블로프의 개"
긍정적 조건반사 - 벨이 울릴 때마다 주인이 음식을 갖다 주면 '벨소리가 난다' = '밥 시간!' 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종소리르 들으면 침을 흘린다.
그러나 이것은 영구적이지 않다. 종을 치고도 먹이를 주지 않는 걸 반복하면,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종을 쳐도 침을 흘리지 않는다.

부정적 조건반사 - 벨이 울리고 개를 뜨거운 전기 그릴 위에 올리면 개는 놀라 달아난다. 이후에 종이 울리면 개는 저절로 도망치고, 이것은 개에게 충격적으로 각인이 되어 전기 그릴을 치운다고 해도 종이 울린 즉시 개가 도망치다보니 개에게 자극원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수가 없다.

한번 새겨진 부정적 기억을 지우려면, 긍정적인 기억을 지우는 데 들이는 노력보다 몇 배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태양의 마차처럼 차라리 약속을 지키지 않아야 할 때도 많다.
파기된 약속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한 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도산 안창호 선생처럼 작은 약속 하나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뢰라는 묵직한 선물을 얻게 된다.


20.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진실은 없다. 주관적 해석만 있을 뿐"
- 니체

(1)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가
미란다 원칙: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적 권리.
그러나 법이 그렇게 정한다 해도 도덕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디까지를 거짓말이라고 봐야하는가?
어떤 말의 80% 정도는 진실이고 20% 정도는 거짓이라면 거짓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부분을 누락시키는 고의성이 있다면.

재판장이 묻는다.
"그날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문제의 자리에는 A, B, C, D 네 명이 있었다. 그러나 증인은 세 명(가령 A, B, D)만 밝히고 한 명은 누락한다. 그 한 명이 결정적 단서라서 일부러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검사는 핵심 인물 C가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묻는데 증인은 C를 언급하지 않는다. 차후 수사에 의해 C가 밝혀졌을 때 증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저는 C가 없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A, B, D가 있었다고 말했을 뿐이죠." 
객관적인 사실에 반대되는 진술은 명백한 위증이고, 또한 의도적으로 부분적인 진실만 이야기한다면 사실에 허위를 가하는 것이기에 역시 위증, 거짓말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정말 거짓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면 칸트는 위협을 받는다. 칸트는 딜레마에 걸렸을 때 진실을 말하되 오해의 소지를 남겨둠으로써 탈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할 바는 있다. 법리로서의 거짓말과 도덕 의미로서의 거짓말을 구분하는 것, 방향성이 선한가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 등이다.

왜 거짓말을 하는가? 왜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보복이 두렵거나 대가를 치러야 해서, 체면이 손상될까봐 그런다.
여기에는 손해 보기 싫다는 이기심과 그 손해가 겁난다는 비겁함이 배어 있다.
진실로 세상과 소통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이 불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진실을 목도하고 그것을 밝혀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정성이야말로 최대의 설득력을 지닌다.

(2) 의도된 침묵과 하얀 거짓말
악에 대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침묵할 수도, 상대를 배려해 하는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칸트는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실이야말로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진실을 얘기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다.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을 때 주인의식을 느낀다. 따라서 모두에게 진실한 정보가 전해져야 한다.

(3) 목적의 왕국에서 살라
모두가 행동했을 때 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이라면 그 행동의 결과 참혹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칸트는 거짓말은 삼가는 것이 좋다가 아니라 어떤 상호아에서도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가언명령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추론한 명령이다. (가장 빨리 가고싶다'면' 비행기를 타라)
정언명령은 그 자체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무조건적인 명령이다.
제1언정언명법: 보편화 가능성 법칙. 어떤 행동에, 모든 사람이 항상 그렇게 한다면 자기모순이 있을지 없을지 살펴보고, 모순에 빠지면 그 행동은 하지 말라
제2정언명법: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지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
제3정언명법: 모두가 자아실현할 수 있는 목적의 왕국에서 살라.
그는 목적의 왕국이 사회적 규율이 될 때만이 진정한 도덕사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4) 거짓말이 최선이라면
시셀라 복Sissela Bok은 "거짓말" 이라는 저서에서, 학술적 거짓말에 뒤따라야 할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꼭 그런 방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가? 그것이 유일한 길인가?
둘째, 꼭 필요한 것인가? 그것이 최선의 결과를 주는가?
셋째, 선의의 피해자는 없는가? 이 거짓말로 상처받을 사람은 없는가?
넷째, 디브리핑(예를 들어, 상대가 너무 어려 진실을 감당하기 어렵다면 시간이 지난 후 이성을 가질 때 사실을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해줄 수 있는가?

이 네 질문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최선의 거짓말이고, 용납될 수 있어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 심리학 실험을 위한 거짓말은 이 네 질문에 YES 라고 말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모든 거짓말이 허락되지 않으면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진실을 말할 타이밍
남녀 관계 있어서 선뜻 말하기 어려운 사항들이 있다.
어느 한 쪽이 불치의 유전병이 있다면, 이혼했었다면, 주요한 부위를 성형했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빚이 있다면, 부모님의 친자가 아니라 양자라면...
고백이 이별이 될 수도 있으니 진실을 토로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다.
결정하더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지만 적절한 시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보통은 청혼하는 날이 가장 적절하다고는 하지만, 과거를 했다가 불행에 빠진 사례 "테스"를 들며 평생 말하지 말라는 의견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이 상대를 위한 최고의 배려이기에 털어놓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고백하기 전, 그 진실과 마주할 준비는 되어있는가?


21. 인간에게 죽을 권리를 허용해야 하는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망할 수 있다."
- 세네카

(1) 영웅적 자살과 비관적 자살
흔히 탄생은 선택이 아니지만 죽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영웅적 자살을 고귀한 행위로 찬양했다. (사무라이의 할복도 그러할까?)
불명예에 처하거나 조국을 구하기 위해, 대의명분을 다하려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이들을 영웅시했다.
고대 철학자들은 죽음도 인간의 권리로 인식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에 있어서 부정한 일은 아닐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라고 보았다. 

(2)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미국의 병리학자 잭 케보키언은 죽음의 의사로 불렸다. 
그는 불치병 말기 환자들의 안락사를 도왔다는 이유로 2급 살인죄가 적용돼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안락사를 더 돕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8년 복역 후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최선인지는 환자만이 말할 문제이며, 안락사 대상자는 단지 죽어가는 게 아니라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악마'로, 존엄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자'로 불렸다.

철학자 제임스 레이첼스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 남은 삶이 한시적이어야 한다. 즉 남은 수명이 6개월 미만이라는 진단을 의사 두 명에게서 공정하게 받아야 한다.
2) 마약 수준의 진통제조차 효과가 없을 만큼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3) 보호자가 간호를 포기하는 경우가 아니라 환자 본인을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3) 죽음으로 존엄을 증명하다
의사는 보호자인 부인에게 환자가 소생 불가능하니 치료해도 가망이 없다고 말한다. 부인은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했고, 병원은 그에 따랐고 환자는 사망했다. 그런데 사망 후 또 다른 보호자인 아들이 나타났다. 아들은 연명 치료를 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며 병원을 고발했고 법원에서는 의사를 살인방조죄로 기소했다. 의료계는 즉각 반박했으나 법원은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판결 이후 의사들은 모든 환자들에게 연명 치료를 시행했다. 보호자가 경제적 요건이 부족해서든 연명 치료하지 말라는 유언을 따라서든 연명 치료를 거부해도 병원은 위 판결 사례를 들며 받아주지 않았다.

보호자는 이런 사태에 대해 다시 법에 호소했고 대법원은 존엄사를 허용했다.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연명 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향후에도 치열한 논란이 예상된다.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은 환자가 있다. 그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다. 의사는 수술을 제안한다.
고통스럽지만 몇 차례 수술을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는 것, 수술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환자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수술을 감당할 자신이 없고, 살아난다 해도 이전 같은 삶을 계속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제안을 거부했다.

당신이 의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사례의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따라 환자의 동의 없이 수술에 돌입한다.
결과적으로 환자는 화상을 극복하고 살아난다.
환자는 왜 나를 살렸냐며 의사에게 끊임없이 항의한다.
의사는 지금이라도 자살하겠냐고 물어본다.
환자는 지금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 내게 왜 내게 항의하는 겁니까?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수술을 받지 않겠습니까?"
"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수술을 받지 않을 겁니다. 내 동의 없이 나를 살려낸 당신이 잘못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환자가 몸에 화상이 심해 사회 생활이 비참한 것도 고려해봐야 할 문제다. 

당신이 만약 그 환자라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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