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월 윤가(尹家)

개업 7개월 만에 '사건'

도쿄 번화가 '긴자 8街'서 한국인 밥상으로 도전장 미슐랭 "자연과 조화된 韓食오감으로 느끼는 레스토랑"

밤무대 가수서 요리 CEO로 정식으로

 

요리 배운적 없어 어릴적 어깨너머로 배웠던 할머니·어머니 손맛으로…" 정성보다 나은 조리법 없다"

한국 온 김에 창원의 시장으로 고들빼기 사러 가던 길이었다.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신경 안 쓴 새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 넘었다. 바다 건너 도쿄의 아들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신호음이 울리기가 무섭게 아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됐어요! 우리가 미슐랭 투 스타(two star)가 됐어요!"

지난해 12월 도쿄 한식당 '윤가(尹家)'가 세계적인 식당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하는 '별 두 개' 레스토랑이 됐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윤미월(57) 사장은 "가슴이 저릿저릿 마비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힘들 때마다 '더 좋은 날이 오겠지' 하며 살았는데…. 오늘이 그날인가 싶었다."

윤씨는 일본에서 김치로 성공한 사업가로 더 유명하다. 어떻게 미슐랭 가이드가 인정하는 한식당까지 내게 됐을까.

"도쿄에서 야키니쿠(일본식 불고기)집과 순두부·비빔밥을 파는 한식당을 했다. 먹는 장사를 하다 보니 일본에서 한식이란 그저 맵고 짜고 자극적이고 싼 음식 대접밖엔 못 받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편견을 깨고 싶었다. 보통 한국인 밥상에 오르는 우아한 한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콧대 높은 미슐랭이 반한 식탁이 이것이다. 지난달 20일 일본 도쿄 긴자의 한식당 ‘윤가’의 윤미월 사장이 차린 음식은 여느 한국 가정에서 쉽게 보던 상차림을 기본으로 했다. 윤가 내부는 정갈한 양반집 느낌이다. 바닥에는 돌 1225개를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잘라 한국의 전통 빗살무늬 모양으로 깔았다. 벽은 작가 이이남의 ‘달항아리’ 등 한국 작가 작품으로 꾸몄다. /도쿄=사진작가 한석일

 

 

◇정성들인 한식으로 단숨에 별을 따다

한식당 윤가는 지난해 5월 도쿄 긴자 8가(街)에 문을 열었다. 도쿄에서, 그것도 명품 중 명품만 모여든다는 긴자 8가에서 한식당을 열어 제대로 된 한식을 인정받겠다는 꿈을 안고서.

"첫 두 달 동안 한 달에 2000만원 넘게 손해 봤다. 임차료만 월 2000만원이었다. 하루에 손님이 딱 한 테이블 있었던 날도 있고, 아예 한 명도 없는 날도 많았다. 식당 열어놓고 돈 한 푼 못 버는 것도 힘들었지만 더 괴로운 건 정성들인 한식이 일본에서도 반드시 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6개월만 버텨보자고 결심했다. 끝내 안 되면 그때는 일본 사업을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도전도 좋지만 어쩌자고 긴자에서도 제일 비싼 명품만 모인다는 곳에 식당을 냈나.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한식을 보여주겠다는 각오였다고 할까. 일본 사람도 긴자 8가에서 밥 먹었다고 하면 목에 힘을 준다. 한식을 먹는 게 그런 식의 자랑이 되게 하고 싶었다. 제대로 도전해보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망해도 여기 긴자에서 망해야 진짜 끝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리사 세계에서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따는 것은 최고 영예로 통한다. 미슐랭 가이드가 아직 한국 내 식당을 상대로 별을 주진 않지만, 미국 뉴욕과 도쿄에는 미슐랭의 별을 받은 한식당이 있다. 2011년 뉴욕의 '단지'가, 2012년엔 역시 뉴욕의 '정식당'이 각각 별 하나를 받았다. 2012년 도쿄의 '모란봉'이 별 두 개를 받았고, 정식당은 지난해 별 두 개로 올라섰다.

윤가는 식당 문을 연 지 7개월 만에, 하나도 어렵다는 별을 두 개나 받았으니 윤 사장이 흥분할 만도 했다. 미슐랭 가이드는 2014년 판에서 '윤가는 자연과 조화된 한식을 오감으로 느끼는 레스토랑'이라고 소개했다.

 

―요리를 어떻게 배웠나.

"윤가 메뉴 구성과 조리는 직접 하는데,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어려서 어깨너머로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을 익혔다. 그래도 스승이라면 한국 요리책. 쌓아놓으면 무릎 높이까지 올라온다."

지난달 20일 긴자의 윤가를 찾아갔을 때 두 번 놀랐다. 식당은 작고 음식은 익숙했다. 99㎡(30평) 크기의 식당엔 4인용 테이블이 하나씩 있는 방이 4개. 최대 16명 수용하는 규모다. 요리도 친숙했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궁중 요리도 아니었고 서양식과 뒤섞인 퓨전 요리도 아니었다. 늘 한국인 밥상에 오르는 맛에 가까웠다. 윤가는 우리에게 친근한 맛으로 콧대 높은 미슐랭의 무릎을 치게 했던 것이다.

이날 먹어본 점심 식사는 삼계탕을 주요리로 한 코스. 1인분에 4800엔(약 5만원)이다. 샐러드는 인삼즙으로 맛을 냈다. 윤씨의 남동생이 함안에서 재배하는 인삼을 쓴다고 했다. 청자 접시엔 멸치볶음, 살짝 구운 명란젓, 연근조림이 놓였다. 저민 완두콩과 유채꽃잎이 투명하게 비치는 젤리도 나왔다. 뒷맛이 부드러운 고추장은 더덕을 갈아 넣었다.

―미슐랭 가이드가 윤가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생각하나.

 

"맛은 주관적인 거라 누구에게나 다 맛있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정성이 들어간 점을 인정받은 게 아닐까. 탕 국물만 해도 그냥 물이 아니라 소고기를 5시간 우린 물을 쓴다. 내놓는 방식도 고민을 많이 한다. 찌개는 여러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끓이지 않는다. 생선은 생선대로 양념해 내놓고, 국물은 따로 조리해서 나란히 놓는다. 찌개를 낯설어하는 일본인들이 쉽게 받아들이더라."

 

 

 

 

◇ 가수의 꿈 버리고 다섯 가족 가장으로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한식당 윤가 앞에 선 윤미월(오른쪽) 사장과 아들 주현철 부사장. /도쿄=사진작가 한석일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윤 사장의 어릴 적 꿈은 가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상경해 무교동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무렵 열두 살 많은 악단 연주자에게 반해 스물한 살에 첫딸을 낳았다. 2년 뒤 아들을 낳고서야 남편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활력 없는 남편에게 양육비를 받기는커녕 위자료를 주고 헤어졌다. 무명 가수로 노래를 불러 번 돈으로 부모를 모시고 두 아이를 키웠다. 서울 연희동 지하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간혹 단체 공연팀에 끼여 일본을 오가게 됐다. 처음 도쿄 땅을 밟은 것은 스물세 살 때. 그 이후 그는 "내 청춘은 스물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꺾였다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래도 견뎠다. 힘들 때면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걸었던 주문 덕분이었다. "더 좋은 날이 올 거다. 꼭 더 좋은 날이 올 거다."

 

―설움과 오기로 버틴 건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 지하 단칸방에 사는데 수시로 월세가 밀렸다. 주인집 전화를 몇 번 얻어 썼더니 주인이 자신이 쓴 전화 요금까지 전부 나보고 내라고 하더라.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 '사장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장이 뭐 하는 건지도 잘 몰랐지만, 다시 이런 설움 안 당하려면, 우리 애들 공부 잘 시키려면 사장이 돼야겠다고, 그래서 당당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맞는 얘기다. 어느 날 아침밥을 하려는데 쌀이 없었다. 텅 빈 쌀통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폐병으로 각혈하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정말 죽고 싶더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삶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이 엄습해왔다. 그날 이후 나는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마가 되어 앞만 보고 달렸다. 텅 빈 쌀통의 기억은 나를 채찍질하는 기수였다."

 

식탁이 차려진 모습. /도쿄=사진작가 한석일

 

일본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무명 가수로 노래하며 일본을 오가다가 1980년대에 일본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 이문은 꽤 남았지만 아무래도 내 일이 아닌 것 같아 고심하던 차에 도쿄 리무진버스터미널 인근에 '기락'이라는 야키니쿠집을 열게 됐다. 워낙 음식은 좀 할 줄 알았다."

 

◇'고집스러운 김치'로 성공

 

―김치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야키니쿠집에 자주 오던 단골손님이 있었다. 건어물상이던 미야마 사장이었다. 그가 업종 전환을 해보려고 고민하다가 한국 김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신주쿠에 가서 지나가는 한국 여자들을 붙잡고 김치 담그는 법을 물어봤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원하는 맛을 찾지 못했는데, 우리 야키니쿠집 김치 맛을 보고 이거다 싶었는지 조리법을 알려달라고 하더라. 그 인연으로 그 회사 고문을 하다가 2000년에 건식무역이란 회사를 차려 '윤가김치'라는 상표로 일본 시장에 뛰어들었다."

 

―일본에 수출하는 한국 김치 업체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던데.

 

"사업 초기 경남 창녕의 한 공장에 김치 생산을 맡겼다. 납품받으러 갔더니 공장 사장이 문을 닫고 안 열어줬다. 알고 보니 경쟁 업체와 이중 계약을 하고 우리를 위기에 몰아넣어 도태시키려는 것이었다. 1990년대만 해도 10여 업체가 경쟁했다. 현재 일본 김치 시장은 6000억원 규모, 그중 한국서 수출하는 김치는 800억원 정도다. 윤가김치는 전량 일본 수출용이다. 한때 연 매출 300억원까지 올렸다. 일본 전국 마트에서 파는 여러 김치 중 가장 한국 김치에 가까운 맛을 낸다고 자부한다."

 

―일본 내에서는 '고집스러운 김치'로 통한다던데.

 

"한국 맛을 알리고 싶어서 시작한 사업이니 무조건 일본인 입맛에 맞출 수는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그래도 기본적인 양념은 한국식 그대로 가야 한다."

 

―김치 사업 하면서 위기는 없었나?

 

"태풍 매미와 기생충 때문에 회사 문을 닫을 뻔했다. 2003년 매미가 닥치자 한국에서 배추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납품할 김치양은 정해져 있는데 약속을 못 지킬 상황이었다. 2700포기 실은 배추 한 트럭에 2000만원이었다. 그나마도 구할 수가 없었다. 장화 신고 우비 입고 강원도 배추밭을 찾아가 한 포기라도 더 건지려고 열흘이 넘도록 땅을 파며 뒤졌다. 약속한 물량을 못 대 숨이 막히는줄 알았다.

 

2005년엔 기생충 파동이 터졌다. 중국산 배추를 쓴 한국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나왔다고 일본 사람들이 한국산 김치를 먹지 않았다. 만들어놓은 김치를 폐기 처분해야 했다. 6개월간 공장 가동이 중단될 정도였다."

 

태풍 매미가 쓸고 간 강원도 배추밭을 헤매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더 좋은 날이 오겠지."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산 배추를 쓰면 됐다. 하지만 한국산만 쓴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는 "당장 발등의 불을 끌 수야 있겠지만 우리나라 김치 사 먹는 남의 나라 소비자를 속였다가 신뢰를 잃으면 재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경영학 석사 아들이 홀 서빙

 

'윤가'의 출발도 쉽지는 않았다. 수억원을 쏟아부어 식당 내부 공사를 마쳤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메뉴를 정하지 못했다. "무슨 음식 내놓으실 건가요?" 아들 주현철(34) 부사장이 채근했다. 개업을 일주일 앞두고서야 요리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미슐랭의 별을 받고 난 후 무엇이 달라졌나?

 

"며칠 만에 3개월치 예약이 다 차더라. 가까스로 수지를 비슷하게 맞출 수 있게 됐다. 그래도 식재료에 들어가는 돈을 아낌없이 쓰기 때문에 돈을 벌기는 어렵다. 이전엔 손님 거의 전부가 일본인이었는데 별을 받고 나서 한국인 손님이 늘어 이제 30% 정도 된다. 제대로 된 한식에 대한 내 신념과 실력을 인정받은 것은 기쁘지만 이 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어깨가 천근만근이다."

 

미슐랭 가이드의 별은 가혹하다. 한번 별을 딴다고 영원히 별을 가진 요리사로 대접받는 게 아니라 매년 다시 평가한다. 지난 2003년 프랑스 최고 요리사 중 한 명이 미슐랭의 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자살한 사례가 있을 정도이다.

 

―궁중 요리를 주메뉴로 낼 생각은 하지 않았나?

 

"제 요리의 바탕은 '할머니 나물'이다. 귀하던 들기름을 넣어 나물을 무치던 할머니의 손맛을 전해주고 싶다. 일본 한식당 중에 궁중 요리를 하는 곳이 있긴 하다. 나도 배워서 할 수는 있겠지만 왕가에서 대물려 전수한 진짜 궁중 요리라고 할 수 있겠나. '궁중' 자는 아무 데나 붙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김치 사업과 식당을 하며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

 

"직원들한테 늘 하는 말이 있다. 되는 꿈이든 안 되는 꿈이든 일단 품어라. 뒤돌아보지 마라. 앞으로 가는 생각을 해야 이뤄진다. 꿈을 위해서라면 세상에 창피한 일은 없는 거다. 저는 사장이 된 후에도 급전이 필요할 때는 다른 한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주방 일을 했다. 하루에 서너 식당을 돌아다니며 일한 적도 있다. 양심을 속이지만 않는다면 어떤 일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돈이 없어 전당포로 들어가는 순간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있는 척하려고 남을 속이는 게 창피한 것이다."

 

윤 사장은 두 자녀를 일찍 유학 보냈다. 딸은 중국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제과점을 한다. 아들은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항공기계학을 전공하고 런던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아들은 결국 어머니의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상차림이다. /도쿄=사진작가 한석일

 

경영학 석사 학위를 가진 아들에게 홀 서빙을 시켰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회사에 들어간다 해도 언젠가는 나와야 할 것 아닌가. 아들도 자기 사업을 해야 하고, 사장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아들, 그동안 엄마가 대주는 돈으로 외국서 공부만 했으니 그 세계밖에 모른다. 아들에게 '바닥을 알고 인생을 배우려면 네가 여기서 접시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인생 수업 현장이 식당이니까. 그래서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접시가 아니라 네 인생을 드는 거야'라고."

 

아들 주현철 부사장은 "미슐랭 선정 기념 식사 자리에 가보니 음식 맛이 대단해서 상을 받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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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일한다는 건 한정된 공간에서 종일 지내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면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 얼굴이 기름기와 땀으로 범벅이 되도록 일하는 사람들. 미슐랭 가이드는 식당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너머에 있는 그 열정과 신념을 인정하는 것이다."

 

윤 사장이 늘 메고 다니는 큰 가방엔 공책 두 권이 들었다. 100여 가지 조리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는 "갑자기 요리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걷다가도 적고 자다가 일어나서도 메모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리 원칙은?

 

"한식은 민낯으로도 고운 요리다. 화장 안 해도 된다. 주방 요리사들이 자꾸 뭘 올리면 저는 즉시 빼버린다. 한식은 그릇에 그대로 담기만 해도 예쁘니까 굳이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나물 무칠 때 마늘은 쓰지 않는다. 마늘은 개성이 강해 식재료 맛을 덮어버린다. 맛을 부드럽게 살리고 약간 달면서도 재료와 잘 어우러지는 양파를 곱게 갈아 무친다."

 

◇"그래도 내 꿈은…"

 

윤 사장은 지난 3월 경남 창원에 한식당 수금재를 열었다. 밀양의 김치 공장에서 가까운 곳이다. 수금재의 기본 조리법은 재료와 코스 구성이 약간 다를 뿐 윤가와 거의 같다. 도쿄 윤가가 미슐랭 별을 땄다는 소식에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었다.

그가 미슐랭 별을 받던 날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을까' 싶었는데, 요즘 '더 좋은 날'에 대한 꿈이 생겼다. 별을 잡고 보니 가슴 한복판에 뉴욕이 들어섰다. "윤가 뉴욕점을 내고 싶다. 한국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서양인에게 소금, 간장, 들기름으로 무친 나물 맛을 알려주고 싶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별을 땄지만, 그의 가슴속에 늘 빛나는 북극성은 따로 있다.

 

"아직도 제 꿈은 가수다. 이번 생에는 어쩔 수 없이 접었지만 다시 태어나면 꼭 가수가 되고 싶다. 대신 일류로."


 

 

미슐랭, 세계적 맛집 評價書… 평가자는 부모에게도 비밀 엄수

 

프랑스 타이어 제조사 미슐랭(Michelin·영어 발음은 미쉐린)에서 발간하는 세계적인 맛집 평가서다. 1900년 미슐랭 창립자인 에두아르 미슐랭과 앙드레 미슐랭 형제가 자동차 여행을 장려해 타이어 소비를 늘려보자는 뜻에서 무료로 배포한 여행 안내서가 효시가 됐다. 별 개수로 맛집을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부터다. 해마다 파리·뉴욕·런던 등 전 세계 주요 도시별로 책자를 낸다.

 

미슐랭의 명성은 평가자(Inspector)들의 익명성과 공정성에서 나왔다. 평범한 손님처럼 찾아가 맛을 보며, 평가자가 누구인지는 미슐랭 간부진에게도 노출되지 않는다. 심지어 평가자의 부모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는 내부 규칙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맛집을 평가하는 빨간 표지의 '레드 가이드' 외에 여행지에 별점을 매기는 녹색 표지 '그린 가이드'도 있다.

 

 

 

‘단 7개월.’ 올 5월 일본 도쿄 주오구 긴자(銀座) 거리에 문을 연 작은 한식당 ‘윤가(尹家)’가 이른바 ‘미슐랭 식당’으로 선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미슐랭가이드는 음식점 평가 요원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손님으로 가장해 특정 식당을 수 차례 방문, 식당에 별(최고 별 3개) 등급을 매기는 세계적 권위의 레스토랑 평가서지요.

윤가는 이달 3일 미슐랭가이드 측으로부터 “2014년판(도쿄편)에서 별 2개(2스타) 음식점으로 선정됐다”는 축하 통보를 받았습니다.
 올해는 일본 도쿄·요코하마 등지의 음식점 총 243곳(3스타: 13곳, 2스타: 55곳, 1스타: 175곳)이 선정됐는데, 한식당 중 뽑힌 단 두 곳 중 하나가 바로 ‘윤가’입니다. 다른 곳은 도쿄 시부야(渋谷)의 모란봉으로, 3년 연속 선정돼 이미 언론의 조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지금껏 미슐랭에서 별 2개를 받은 한식당은 뉴욕 정식당과 모란봉 뿐이었는데, 윤가가 새로 이름을 올린 것이지요. 특히 개업 7개월만에 거둔 성과였기에 심지어 윤가 윤미월(56) 대표의 가족·친지들도 처음에는 미슐랭 선정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표 윤씨는 “몇 달 전 일본 잡지에 (윤가가) 소개되긴 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면서 “미슐랭에선 역시 그 부분을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윤씨가 말하는 ‘그 부분’은 과연 무엇일까요.


2주에 한 번씩 한국 오가며 공수해오는 ‘최고 재료’

윤가는 완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방 4개, 16석 규모의 99㎡(30평) 남짓한 작은 한식당입니다. 인테리어가 화려한 것도 아니고, 간판이 크지 않은 데다 출입문까지 어두운 색이라 찾기도 힘듭니다. 직원도 대표 윤씨와 아들 내외를 포함해 7명이 전부지요. 그야말로 ‘맛’과 ‘자신감’으로 승부한다는 얘깁니다.

 

 

미슐랭이 올해 일본 도쿄·요코하마 등지 음식점 총 243곳을 선정됐는데, 한식당 중 뽑힌 단 두 곳이다. 이중 하나가 바로 '윤가'다.

지난 9월말 윤가를 찾은 미슐랭 평가 요원 2명은 갈비찜 정식 등을 먹다말고 들기름에 무친 산나물 반찬을 한 입씩 맛보더니 윤씨의 아들이자 이곳 부사장인 주현철(33)씨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12월에 한국에 가는데 어디로 가면 이런 요리를 맛볼 수 있습니까?” 주씨는 이들이 미슐랭 평가 요원인 줄은 모르고 속으로 ‘맛을 아는 사람들이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슐랭가이드는 훗날 윤가를 가리켜 “자연과 조화된 한국 요리를 오감으로 맛볼 수 있다”면서 윤가의 산나물과, 12가지 한방 재료가 들어간 간장게장, 비빔밥을 소개했습니다. 비결은 역시 윤가 음식의 ‘재료’였습니다. 윤가 메뉴는 한방삼계탕 정식과 한방곰탕 정식부터 각종 단품 요리, 코스 요리까지 10여가지에 이릅니다. 이 음식들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대표 윤씨가 직접 고릅니다.

윤씨는 2주에 한 번씩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신선한 한국 식자재를 들여온다고 합니다. 산나물 류는 경남 산청에서 가져오고, 윤가 주 메뉴 ‘약선(藥膳) 요리’에 들어가는 인삼·상황버섯·구기자 등 주요 약재들도 모두 한국에서 직접 공수해옵니다. 꽃게 같은 해산물은 윤씨가 새벽 4∼5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일본 최대 어시장 ‘츠키지시장’에 가서 골라옵니다. 게다가 소금은 산청뽕소금을 쓰고, 간장도 일본에서 가장 비싼 최상급만 쓴다니 윤가가 식자재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윤가는 이런 최상의 재료들로 육수를 내고, 요리를 만듭니다. 심지어 소스도 직접 제조하는데, 복분자 소스가 들어간 ‘복분자 샐러드’와 인삼 소스가 들어간 ‘인삼 샐러드’는 외국 손님으로부터 “특이하면서도 맛이 좋다”는 평을 받는다고 합니다. 윤씨가 이처럼 재료를 중시하는 건 그간의 경험 때문입니다.

2008년 처음 차린 대중 한식당과 2009년 도쿄 전통식당 거리 닌교초(人形町)에 문을 연 불고기(야끼니꾸) 전문점을 운영하면서 그는 “음식 맛의 절반 이상은 바로 ‘재료’에서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윤씨는 이 식당들을 운영하다 진정한 고급 한식을 알리겠다는 마음에 긴자에 윤가를 열었습니다. 윤가는 지난 5년 간 윤씨의 한식당 운영 경험을 통해 완성된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이지요. 새로 낸 식당이지만 ‘재료가 음식 맛을 좌우한다’는 그의 철학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윤씨가 발품 팔아 공수해 온 최상급 재료로 요리를 만드는 건 윤씨와, 주방장 허원영(39)씨 등 요리사 4명의 몫입니다. 이들은 각각 한식, 중식, 일식 등의 전문가라고 합니다. 윤씨는 이번에 윤가 문을 열면서 한국·일본 등 다국적 요리사 60여명을 면접했고, 이 중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 요리사 4명이 낙점됐습니다.

 

 

미슐랭 별 2개를 받은 일본 도쿄 긴자의 한식당‘윤가’에서 윤미월 사장이 갈비찜과 부침개, 산나물 등 전통 한국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리고 있다.

윤씨는 “면접 대상자들은 모두 실력 있는 요리사들이었지만, 한국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깊고 한식 본연의 깊은 맛을 내는 이들은 역시 한국 요리사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매달 2600만원 적자에도 한국을 알리겠다는 ‘정성’

윤가는 도쿄 중심가인 긴자 한가운데 위치해있지만, 인근 고급 레스토랑에 비하면 가격이 훨씬 저렴합니다. 한방삼계탕 정식과 한방곰탕 정식은 3800엔(약 3만9000원)이고, 갈비찜 정식도 4800엔(약 4만9000원)이지요. 윤가에서 가장 비싸다는 코스 요리도 2만엔(약 20만5000원)입니다. 10여가지 메뉴 모두 일본 도쿄의 다른 고급 한식당보다 싼 편에 속합니다. 특히 저녁에도 코스 요리가 아닌 단품·정식 요리를 주문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윤씨는 “윤가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 개업 당시 식당 인테리어에 1억엔(약 10억원)이 들었고, 비싼 월 임대료(200만엔) 탓에 요즘도 매달 260만엔(약 2650만원) 가까이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지인들은 물론 건물주조차 “단가도 안 맞는 장사를 왜 하느냐”며 말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식당을 계속 유지하는 건 순전히 “손해를 보더라도 몸에 좋고 맛도 좋은 한국 음식을 알리고 싶다”는 윤씨의 고집 때문이지요. 윤가 운영으로 보는 손해는 김치 사업으로 메우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 ‘김치 장인’으로도 불리는 윤씨는 김치를 일본에 수출하는 김치 제조·수출업체 ㈜건식무역 대표입니다. 일찍 남편과 헤어진 뒤 28년 전인 1985년 두 남매를 데리고 일본에 건너와 처음 시작한 일이 바로 ‘김치 장사’였지요. 그는 한국 김치 수입업체에서 13년간 김치 품질 관리를 담당하다가 1998년 건식무역을 차렸습니다. 이후 일본 내 김치 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이 회사는 현재 연 매출 300억원대 기업으로 컸지요.

 

 

윤가 윤미월(56) 대표의 가족·친지들도 처음에는 미슐랭 선정 사실을 믿지 않았다. 대표 윤씨는 "몇 달 전 일본 잡지에 소개되긴 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윤씨는 “세계 어느 음식보다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들어가는 한국 요리가 일본에선 값싼 음식 취급을 받는 게 김치 사업을 하면서도 늘 마음 아팠다. 그래서 식당을 시작했고, 고급 한식당인 윤가까지 열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들 주씨는 “김치 사업만 하면 평생 편히 살 수 있는 분이 왜 이리 한식당을 고집하실까 이해가 안 됐다”며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어머니께 ‘지금 적자로 매달 외제차 한 대씩 살 수도 있겠어요’ 말씀드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본인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외국인들을 보고 뿌듯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윤씨는 지금도 말합니다. “돈은 밥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되고, 이젠 음식으로 한국을 알리고 싶어요.”

미슐랭 별 3개를 향한 윤가의 ‘또 다른 도전’

윤가는 그저 음식만 파는 식당이 아닙니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김치 전문가인 윤씨는 지금까지 외국인 400여명을 대상으로 ‘김치 교실’을 열었습니다.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에서 일하는 한 일본인이 손님으로 왔다가 “외국인들에게 김장 문화를 알리고 싶다”는 윤씨 얘기를 전해듣고, 직접 수강생들을 모았다 합니다. 수강생들은 5000엔(약 5만원)만 내면 김장을 직접 체험하는 동시에 윤가의 정식도 맛볼 수 있습니다. 입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거의 매달 김치 교실을 열고 있고, 내년 1월에도 예정돼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윤가는 한국 공예가들이 만든 전통 식기를 쓰고, 한국 화가 그림들을 걸어놓고서 식기나 그림을 원하는 손님들에게 판매하기도 합니다. 한복 입은 여인 등 한국 전통 문화를 표현한 그림은 한 점당 2000만∼4000만원을 호가하기 때문에 실제 구입한 손님은 없지만, 윤씨는 “그림을 팔기보단 손님들에게 한국 화가들의 작품과 실력을 알리려고 구입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지난 3일 미슐랭에서 걸려온 전화를 떠올리며 “반평생 꿔온 꿈이 절반쯤 이뤄지는 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아직 절반이 남았다는 얘기고, “이제 다시 시작일 뿐”이라 말합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50대 여사장은 요즘도 매일 요리 서적을 읽고, 매주 직원들과 함께 ‘새 메뉴’ 아이디어 회의를 합니다. 한 달 중 보름 정도는 한국에 머물며 좋은 식재료를 찾고, 한국과 일본의 유명하다는 식당도 직접 찾아가본다 합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이달 말에는 경남 창원에 ‘윤가 한국점’도 오픈할 예정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미슐랭 별 2개 한식당’ 윤가의 맛을 볼 수 있게 된 셈이지요. 윤씨는 한식당 최초로 별 3개에 도전해보겠다고도 했습니다.
“한식이 맵고 짜다든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겁니다. 지금처럼 좋은 재료를 마음을 다해 대접한다면 어떤 목표도 이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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