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삶이라는 시간은 시작부터 사라져가는 것일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서문>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이 발현하는 순간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감정, 불현듯 불길로 솟아오르는 마음이나 물길을 만들며 흘러가는 느낌이 심장에 새겨질 때, 또는 시간의 무수한 겹이 쌓여 층을 이루고 그것이 어떤 아름다운 무늬로 완결될 때, 그리고 사람의 생에 촘촘하게 박힌 슬픔이나 결핍 같은 것이 노래나 춤, 그림이나 글로 모습을 그러낼 때. 존재한 적 없으나 이제 존재하게 된 무엇은 타인의 감각, 그러니까 시각과 촉각과 후각과 청각과 미각을 자극하고 그의 세계를 간여한다.
P15
바닥이 보이지 않는 슬픔을 가늠해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아득하게 앙망할 때. 닿을 듯 닿지 않고 떨어질 듯 떨어질 수 없는 사이사이.
무언가를 조율한다는 것은, 의견이나 삶을 조율한다는 것은, 다른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고유한 음을 찾아주는 일이라는 것읗, 나는 알고 있으므로.
P16
피아노의 팽팽한 현을 잡아당겨, 도로 태어난 건반이 도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도인 당신과 미인 내가 한 음 높아지고 한 음 낮아져 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의 소리로 빛나고 나는 나의 소리로 당신의 세계를 밝혀, 멜로디는 화음이 되고 화음은 노래가 되고 노래는 시가 되어주기를, 이렇게 우리 하나의 세계에 담겨, 어깨를 나란히 하고.
P17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
P18
어쩌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떨림 그 자체가 아니라 떨림이 지나간 후의 여운일지도 모르겠다, 하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가 머물다가 떠나간 후 빈자리에 남아 이미 지나가버린 열정을 되돌아볼 때의 그 뒤늦은 떨림 혹은 떨림의 여운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뒤늦은 자각이 마음을 흔든다.
어떤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 떨림의 여운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일지도 모르겠다. 떨림의 중심에 있을 때, 나에게 정말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모를 때,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알 수 없을 때는 그 짧은 순간을 느끼는 것만으로 이미 벅차다고. 마치 작은 돌맹이 하나를 집어 들어 물속으로 던졌을 때, 돌맹이가 물의 표면과 부딪치는 순간과 흡사하다고.
P19
돌맹이는 곧 물속으로 가라앉지만 돌맹이가 닿았던 물의 표면에서 작은 물결이 일어나 점점 번져간다. 돌맹이는 이미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점점 번져가는 원의 중심축이고, 그래서 우리는 한때 그곳에 돌맹이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결의 원이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원은 점점 커져간다. 어쩌면 원의 가장 바깥 선들은, 이미, 자신이 시작된 곳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는 떨림의 순간에서 떨어져 나와, 어리둥절한 채, 점점 큰 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물결에 밀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중심을 그리워한다. 내가 이만큼 이쪽으로 밀려오는 동안, 당신은 저만큼 저쪽으로 밀려가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돌맹이는, 최초의 돌맹이는 이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의 생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과 그들이 주고 간 여운, 혹은 망각. 삶은 계속되고, 살아가는 동안 아무것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P22
지니고 있는 마음이 또렷하고 선명하여 들키지는 않을지, 그런 기우들이 스쳐 가고 고개가 갸웃해진다.
P24
그 사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걷는 속도, 그리고 보폭을 조심스럽게 측정하며, 언제, 어떻게 느려지는지, 왜, 무엇 때문에 빨라지는지, 몸과 마음으로 동시에 늒고 반응한다.
P25
존재인 동시에 개념인 것들.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잊어버리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고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세계를 확장시킨다. 세계의 대부분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불필요한 비관이나 자격지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다.
P26
깊이가 없다면 단순함도 없다.
P29
아침에 너는, 세계의 엄격함에 절망하고, 더 이상 축소되거나 확대되지 않는 일상에 갇힌 기분을, 이를테면 답답하거나 안전한 기분을 점검한다. 하루를 버티기에는 희망보다 절망이 조금 많다고 생각한다.
P34
너는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완벽한 끝을 원했으므로, 모든 말을 삼키고 몸을 돌려, 햇살이 한없는 거리를 걸어, 네게서 멀어졌다. 너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믿은 적 없으니, 나는 배신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 정도는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지 못할 말들이 무거운 혀 끝네 매달려 돌처럼 단단해지고, 그 무게로 조금 휘청거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멀어질 수는 있었다.
P37
그리고 문득 시작된 밤 속에서 맥락을 잃어버린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켜졌다가 꺼지고, 꺼졌다가 켜지기를 반복하는 순간에 몇 가지 새로운 의미가 고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기억의 물기를 털어내고 반듯하게 접어 어딘가 어두운 서랍 속에 넣어두기로 작정했다.
무엇보다 나는 솔직했다. 나 자신에게조차 그랬다. 뜻하지 않았던 최초의, 그 날것이었던 감정에 매달려 있을 때도, 점점 벼랑의 끝으로 밀려갈 때도, 발아래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고 푸른 물을 외면하지 않았다.
P39
가난하고 고집 센 나날들 속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하나의 빛이 꺼지는 순간, 한숨 같은 마지막 호흡을 내뱉으며 미래의 한 부분이 죽어버린다.
그의 검은 그림자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지나간 시간을 부검할 때.
P40
그리고 모든 놀랍고 아름다운 일 다음에,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P40
당신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으나 눈길이 부딪치려는 순간마다 묘하게 어긋났다. 그것이 무엇이든 들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당신에게 있었는데, 그 의도가 내게 중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가 가방을 뒤져 머리핀을 찾았는데 그 행동은 이미 무관심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당신이 모를 리 없었다. ***
P44
그런 식으로 한 번 템포가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당신이 감추고 있는 것들이 출렁이다 문득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찰나를 낚아채기 위해.
당신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신의 움직임, 손의 동작과 시선의 방향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당신은 감정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만, 감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모든 결론을 유보하고,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로맨스는 로맨티스트에 의해 창조될지 몰라도, 로맨티스트는 로맨스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갈피 없는 나의 말에 마침표를 찍었던, 그의 마지막 문장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P45
삶이란 어짜피 기다리는 것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누구도 삶의 안쪽을 다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P46
삶과의 계산은 모두 끝난 셈이라고.
P50
더 이상 덧댈 것도 덧날 것도 없는 덧없음, 어느덧 지나간 그 짧은 순간에 대해.
P51
문신을 새기는 사람이 말했다. 무엇이든 오래 지속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P52
영원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면 문신 같은 건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그는 타이르듯 말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어떤 아름다움은 그 슬픔을 지속시킬 용기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P53
지속이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영원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 어나라 초월하고 또 초월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았다.
P59
굳이 그랬어야 했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나라면 이랬을까, 저랬을까, 그 모든 가정들과 선택할 수 없는 선택들도 부질없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할 수 없음을, 이미 만나버린 사람을 어찌할 수 없음을.
P62
그때 그곳에 두드리지 않았던, 혹은 열어주지 않았던 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문은, 그저 문으로 남았다.
P63
세상은 이렇게 되지 못한 것 투성이입니다. 내가 여태 당신의 꽃도 열매도 되지 못한 것처럼.
P64
만약 처음부터 갈라짐을 위한 결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갈라짐에 대한 저항은 무의미하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갈라진 모든 것들은 그리움을 원죄처럼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움에는 독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의 공간으로 들어와버린 무엇을, 나는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P76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던 너의 계획은, 그녀가 전화를 하지 않음으로써 어긋난다.
너는 그녀에게로 기울어졌고 그녀는 너를 버거워했다.
P80
반짝이는 행복을 발견한 불행은 그들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집 앞에는 남자가 여자를 처음으로 바래다주었던 그날이 여전히 머물러 있고, 여자가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던 그날이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P83
자연스럽다니, 증상이 불편한 게 아니라 그 불편함이 노화에서 온다는 게 불편한 거라고.
P96
어쩌고 있나요, 어쩌지도 못하고 있나요.
사랑하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일, 영원하지 않기 위해 소진하는 일, ***
P98
마음을 확인하고도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손안에 쥐고 촉감을 느낄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었으므로, ***
P99
어지러운 끌림을 마음이 받치고 있던 날들이었다. 가벼운 것이 날아오르고 무거운 것이 떨어지듯, 어느 날 끌림과 마음이 자리를 바꾸었다. ***
P104
'여기까지'와 '다음에 또' 사이 어디쯤에 있을 미래를 뒤로하고, 나는 이해 불가능한 현재로 발을 내딛는다.
P124
우리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까닭은, 들려주고 보여주기만 하는 이유는, 그게 바로 인생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친절하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인생을 본 적 있습니까?
P126
어쩐지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버린 것 같아 나는 대화의 방향을 자꾸 상대에게 돌렸다.
P136
희망의 '희'는 '드물 희'지. 그러니까 희망은 희미하고 드문 무엇을 바라는 거야.
P150
왜 내 삶의 어떤 부분은, 풀리지 않는 은유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P151
사소한 무심함으로 울다가 사소한 다정함으로 웃는다. 사소하게 기대하다가 사소하게 실망하고 사소하게 위로를 구한다. 사소하게 숨기거나 사소하게 드러내거나 사소하게 자랑하다가 사소하게 후회한다. 사소한 인연이 사소한 기억으로 가까워졌다가 사소한 망각으로 멀어진다. 나의 삶이 온통 사소함으로 채워져 있으나 사소한 행복은 가볍지 않고 사소한 견딤이 쉽지는 않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절망이 사소하지가 않다.
P156
나는 익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동시에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편안함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P157
다만 한 걸음을 옮기기 위해, 그것이 당신을 향한 걸음이거나 혹은 돌아서는 걸음이거나.
P160
며칠 동안 생각의 맥락이 가닥가닥 끊어졌고 그래서 할말이 없었다. 몇 개의 단어들이 서성이다 문장이 되지 못하고 증발했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어나는 방식'에 놀라움을 느끼기 바라다던,
P169
삶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사랑은 예고 없이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도 나부끼는 것이라고,
저마다의 이유에는 어떤 공식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P171
불행의 중력에 의해 마음이 끌려갔다.
P173
아니 어쩌면 나의 냉정함이, 네가 살아남기 위해 붙잡아야 할 전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P176
인연인 줄 알고 묶어둔 매듭이 더듬더듬 풀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이 자리에 이대로 가라앉아 있다. 그냥 여기까지였다고 그냥 말을 하면 그냥 여기까지일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먼 곳을 바라본다. 처음엔 달랐으나 도중에 같아졌음으로 앞으로도 여전하리라던 부질없는 믿음이 보풀로 흩어진다. 튼실했던 기억들은 어찌도 이리 연약한 시간 안에 담겨 있었을까. 함께 이정표를 세우며 걸어왔던 길은 어찌 이리 여러 갈래로 갈라졌나. 운명이라 알고 묶어둔 삶이 너덜너덜 헤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이 자리에 이대로 못박혀 있다.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몰라서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우리는 그냥 여기까지이지만 차마 여기까지일 수는 없어서. ***
P187
한때 가까웠던 사람이 멀어진다. 나란하던 삶의 어깨가 조금씩 떨어지더니 어느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특별한 일이 생겨서라기보다 특별한 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맞았다가 안 맞게 되었다기보다, 조금씩 안 맞는 마음을 맞춰 함께 있는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쪽이 싫기 때문이 아니라 저쪽이 편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때 가까웠으므로 그런 사실을 털어놓기가 미안하고 쑥스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89
삶이란 둘 중의 하나,
이것 아니면 저것.
그런 것들이 쌓여 운명이 되고 인생이 된다.
P190
그 모든 말들보다 높은 밀도를 지닌 침묵이 우리 사이를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만약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너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 너 자신에게 배신을 당할 거야, 본능이 날카롭게 내뱉었고, 나는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걸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으므로, 곧 지쳐버렸다. ***
P191
나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운명은 필요 이상의 친밀함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것을 거역할 용기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
P200
완벽함은 영원하지 않고, 영원함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P201
어딘가에 묶여 있지 않으면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튼튼한 매듭으로 강둑에 묶여 있는 나룻배라 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바람에 몸을 뒤척이는 물의 탓이다. 매듭을 끊고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일을 꿈꿀 때마다, 마음속에 촛불이 출렁였다. 초는 갈수록 짧아져갔고 심지는 점점 검어졌으므로 결심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
P204
한동안 그도 괜찮을 것이다. 멀리 숲이 보이고, 일상은 그의 등 뒤로 착실하게 멀어지고 있으므로.
P208
흐물흐물 형체를 잃고 갈수록 말랑해지는 자신의 시간들이, 초점을 맞춘 카메라 렌즈처럼 선명해지는 느낌.
침묵과 비밀을, 중립을, 간격을 지킨다. 집을 지키고 자리를 지킨다. ***
P211
어떤 사실은 진실이 될 수 없고 어떤 진실은 사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는 잊지 않기 위해, 그 처연한 하강을 간직했다. 일곱 개의 계단을 사 초 만에 뛰어오를 수 있도록. 그 게단 어디쯤에 있을 너에게 두 번 다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도록.
P215
그렇다.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다. 잠깐 길을 잃었어도, B와 C 사이에 있다.
P216
햇볕을 듬뿍 받고 잘 마른 빨래처럼 당신의 마음은 보송보송하다.
P218
그날부터 당신의 마음은 금이 가고 당신의 날들은 위영청, 기울어졌다.
앞만 보고 걸어가던 당신이 멎은 건 그때였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문득 세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인하다는 것은 가벼울 대로 가벼워져서 투명해지는 것, 중력을 벗어나 날아오르는 것이라는 것을 배울 때가 되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상기한다. 의미로 가득 찬 칸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당신은 아득한 행복에 빠진다.
P220
여배우는 흑백처럼 단조로운 그의 일상에 불현듯 나타난 신비였고 미스터리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무관심하게 스쳐 간 이들이 문득 뒤를 돌아보고, 지금 막 소중한 무언가를 놓쳤다고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P224
어디로 가는 거야,가 아니라 왜 가는 거야, 라고 해야 한다고. '어디로'는 중요하지 않다.
P228
오래된 존재들의 찰나를,
P230
너무 많은 생각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으려 한다. 풀지 못한 오해와 사과하지 못한 잘못과 좀 더 용감하게 굴지 못해 잃어버린 것들이 있으나 대체로 괜찮은 삶이다.
P231
느리게 꼼지락거리는 삶에 익숙하고 만족하는 달팽이들도 많았지만, 볼행히도 그는 철학자로 태어났다.
철학 즉 Philosophy의 어원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철학의 특수한 기능은 어떤 사회 구성체의 개인에게 당시 사회에, 특히 그 계끕의 역사적 과제와 목표에 부합되게 사고하고 행위할 수 있도록 포괄적이고 근거 있는 세계관적 방향성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철학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철학적 달팽이에게는, 모든 달팽이들이 그들의 역사적 과제와 목표에 걸맞은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세계관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위해 지혜를 사랑하는 본능을 타고난 것이다.
P232
지루함에 관한 한, 달팽이를 능가하는 존재는 흔치 않으므로, 흐늘거리는 근육을 자부심으로 채우고 그는 기록을 게속한다.
P239
어째서 우리 사이의 미세한 균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P245
어찌하여 삶이라는 시간은 시작부터 사라져가는 것일까.
P250
그 생각을 계속 밀어내고, 그 자리를 망각으로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거야. ***
P265
청춘은 미끄러지듯이 그녀를 통과했고 열정은 추락하듯이 떨어져 내렸다.
P276
우리는 누구나 떨림의 순간을 붙잡고 그 벅찬 느낌 안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떤 성숙한 정신은 떨림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가고 밀려나는 시간을 받아들인다.
말과 문장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힘으로 아름답다.
P277
그 망각과 여운의 흔적이 있는 한, 떨림은 보존된다는 것을, 떨림이 보존되는 한 되풀이는 없다는 것을. ***
#황경신 #나는토끼처럼귀를기울이고당신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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