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물어봤어야 할, 들었어야 할 이야기들은 묻히고 전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시끄러운 소음들 속에서 속뜻을 헤아리는 것도 이젠 지친다. 사람들은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하지 못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을 묻지 못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듣지 못하며, 지레짐작하면서 혼자 병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지 않은 질문’을 대신 묻고, ‘듣지 못한 대답’을 대신 들어보기로 했다.
당신이 들었어야 할 누군가의 속마음, 그리고 당신이 마땅히 대답했어야 할 당신의 진심. _12쪽.
나는 살아가는 것일까. 살아 있는 꿈을 꾸는 것일까. 그저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_27쪽.
꿈은 밝고 긍정적이어야만 한다는 것, 미래를 향해야 한다는 것,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것, 한 사람 몫을 해야 한다는 것, 쓸모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 나는 꿈에서 이 모든 것을 거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침묵하지 않게 할 꿈에 대한 질문은 ‘희망으로 가득 찬 꿈’이 아니라 사실은 ‘빌어먹을 꿈’이 아닐는지. 그렇게 나는 사람들에게서 실패한, ‘포기한 꿈’을 묻기 시작했다. _35쪽.
이제 설문 <당신이 버린 꿈>은 사람들이 보내온 ‘버린 꿈’만 의무감으로 모아오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자신이 포기한 꿈을 버렸지만, 나는 지금껏 사람들이 버린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왜 버리지 못했을까. 사실 포기한 꿈을 마주하는 것은 제3자인 나도 즐거워하는 일은 아닌 것이, ‘버려진 꿈’을 보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행한 끝이 보이는 누군가의 삶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그들이 언젠가 찾으러 오지 않을런지 하는 부질없는 기대도 있으나, 그냥 누군가는 이를 기록하고 간직해야만 할 것 같았다. _80쪽.
[실연 물품]
구매는 주로 중고 사이트에서 이루어졌는데, 우선 사연이 있어 보이는 물건을 고른 뒤 판매자에게 내용을 확인했다. (…) 혹시 다른 종이학 선물이 또 있는지 사이트를 뒤지던 터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판매자 역시 오랫동안 집에 자리만 차지하는 것 같아 팔고 싶다고 하는데 사연을 물으니 남편 물건이라 모른다고. 사연이 있으면 구매하고 싶다고 의견을 전달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남편의 전 여친에게 전달되지 못한 선물이라는 것(부인이 알려줬다). 그렇게 내 손에 전달된, 한 남자의 순정으로 접은 종이학은 유리병에 조심스럽게 담겨 있었다. 병을 열자, 종이학들 사이에서 좁쌀 같은 것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처음엔, 너무 오래 보관해서 종이들이 삭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 그 좁쌀들은 종이배였다! 절대 사람 손으론 접을 수 없을 것 같은 크기의 종이배들이 천 마리 종이학과 함께 들어 있었고, 시중에 파는 종이로 접은 게 아닌 학들을 펴 보니, 역시…. 이 남자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_104~105쪽.
최근 당신은 언제, 무엇 때문에 설레었는가? 설렘이란 감정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설레는 일에 나이를 운운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 두렵고 감정도 버겁다. 그렇게 감정이 제거된 일과 무감각한 사람을 주변에 채워가며 ‘나는 안전하다’고 안심하며, 저마다의 굴로 깊이 들어가 더 깊은 곳에 불안한 감정을 묻는다. 그렇게 속이 텅 빈 몸뚱이만 남아 그대로 어둠과 함께 사라지고 싶은, 나 하나쯤 이 세상에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고 그냥 ‘사라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귀찮음이 커지면 우울하거나 슬프지도 않고 단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귀찮을 뿐이다.
어차피 나이가 들수록 맛있는 것을 먹어도, 즐거웠던 일을 해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도 예전 같지 않고 뻔해진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 “감정 따위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며 자신의 속마음은 땅에 묻은 채 100퍼센트 안정이 보장된 완벽한 날만을 기다린다. 그날엔 반드시 충분히 기뻐하겠노라고. _174~175쪽.
영상작품을 위해 취재한 21명의 인터뷰이들은 최소 40세 이상, 구로공단(금천과 안양 지역) 산업체에서 근무했거나 관련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이다. (…) 몇몇 분들은 구로공단과 관련한 인터뷰 경험이 있었고 대부분은 이번 인터뷰가 ‘산업화’와 관련된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신 분들은 느닷없이 ‘첫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으니 대부분 무방비 상태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_188쪽.
2019년부터 진행된 <(주)퍼펙트패밀리>(perfectfamily. co.kr)는 일본의 역할 대행업에서 착안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인구 소멸 사회로 향하는 미래, 1인 가구에게 사람을 빌려주는 가상회사이다. 사실 아버지와 친인척 장례식을 경험하면서 나와 같은 1인 가구는 장례식조차 못 해볼 것 같은데 국가는 혈연 가족제도를 바꿀 생각은 없어 보이니, 죽는 마당에 가족법 어기는 게 대수랴. 가짜 가족이라도 빌려서 죽음의 존엄은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됐다. _265쪽.
“대체 내가 문화부 기자인지, 사회부 기자인지.” “기자님, 저는 제가 예술가인지 기자인지 모르겠어요.” (…) 코로나 유가족 취재를 진행하면서 『부산일보』 [문화부] 오금아 기자와 자주 나눈 대화이다. 그만큼 우리가 하는 일이 문화와 예술의 일인지가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은 2019년에 발표한 영상작품 <후손들에게>를 제작하면서도 느꼈는데, 고독사 취재를 다니면서 ‘나는 왜 사회부 기자 같은 일을 하고 있나’를 고민했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이 내용을 가지고 ‘멋 부리지 말자’는 기준을 명확히 세우고 최대한 예술가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_341쪽.
<꽃이 지는 시간>에서 꽃이 죽으면, 죽은 시간을 기록한 종이 태그를 달아, 또 다른 설치작품 <오아시스 제단>으로 옮겨진다. 원래는 오아시스 벽면을 생화로 가득 채웠어야 했으나, 한 송이 꽃도 꽂아보지 못한 코로19 유가족들의 ‘상실된 장례’를 나타내고 싶었다. 텅 빈, 마른 오아시스 벽 앞에서 관객들이 ‘꽃 한 송이 바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 마음으로 유가족들을 위로해주길 바랐다. 마치 이곳이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자책하며 아파할 그들에게 위로의 공간이 되길 바랐다. _351쪽.
프로젝트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가’ 시리즈를 포함해서 <당신이 버린 꿈>, <오래된 약국>, <실연 수집>, <늦은 배웅>과 같이 사라지고 있는 것들, 상실을 다루는 작품들에서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내게 자신의 세계를 말해준 이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꿈과 사랑을 포기하고 ‘나’보다 ‘너’와 ‘우리’를 선택하여 겨우겨우 ‘보통’의 위치까지 이르렀는데, 기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은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디는, 무던히도 성실하게 살아온 ‘우리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한 것이라고는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손에 쥔 게 없다. (…)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혼자 있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사유할 수 있는 뒷방을 가지지 못하며 매일매일 변하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이 사라진 당신, 만사가 귀찮고 새로움도 설렘도 사라진 지 오래고 오직 염려하던 미래가 닥칠지, 어떻게 하면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는지만 골몰한다. _362~363쪽.
http://dolbegae.co.kr/book/3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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