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나온다. 이 정의를 통해 시장이 성립하는 필수 요소를 짚어 보면 거래의 목적물과 그에 상응하는 대가다.
시장의 필수 요소
거래의 목적물은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으로, 노동력 그 자체도 거래된다. 거래목적물에 대한 우리의 기준은 각자 다양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 품질과 다양성에 대한 확신 혹은 신뢰다. 거래목적물에는 대가가 따른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 역사적으로 돈이라고 부르는 지불수단의 형태는 여러 가지로 진화해 왔다.
우리 손에서 직접 만져지고 건네지는 동전이나 지폐와 같은 전형적인 형태의 지불수단을 기본으로, 그를 가능하게 하는 대체 수단들까지 무수히 많다. 최근에는 실제 주고받는 것은 명세서 한 장뿐이고 그나마도 전자명세서로 바뀌면서 지불수단의 형태와 흔적은 사라지고 있다. 물건을 갖게 되지만 치른 값은 개념적 숫자일 뿐이다. 지불수단의 발전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지불수단은 편의성이 핵심이다.
제품, 결제수단, 공간은 괜찮은가?
소비자가 거래 채널, 유통 채널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장보기를 할 때 무엇을 고려하는지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2020년 한 리서치 기관에서 조사한 재래시장 관련 조사 결과, 소비자들이 장보기를 할 때 주로 고려하는 요인으로 상품서비스, 지불수단, 거래의 물리적 환경이 주요 항목으로 꼽혔다.
상위 8개 답변을 정리해 보면 ‘제품’에 관한 것 4가지(가격이 저렴한가, 제품 종류가 다양한가, 제품이 믿을만한가, 가격 비교가 쉬운가), ‘결제수단’에 대한 것 1가지(다양한 결제수단 이용 가능), ‘공간’에 대한 것 3가지(가까운 곳인가, 교통편이 좋은가, 깨끗하고 위생적인가)로 묶어 볼 수 있다. 이것은 소비자가 어떤 유통 채널을 접하더라도 제품, 결제수단, 공간을 기본 카테고리로 설정하고 세부 사항을 살핀다는 뜻이다.
위의 3개 카테고리, 8개 세부항목을 기준으로 전통시장을 한번 들여다보자. 과연 전통시장은 어떤 모습일까?
가격 외에는 강점 없는 재래시장
2017년 컨슈머인사이트와 한양대가 함께 조사한 각 유통 채널별 인식을 살펴보면 재래시장은 13개 오프라인 유통 채널 중 꼴찌에 가까운 11위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채널별 세부 평가항목 평가에서 재래시장은 제품가격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항목에서 아주 낮은 평가를 받았다. 결제수단의 다양성 평가는 평가 항목 중에서 휴식공간을 제외하고는 최하에 가깝다.
제품과 관련된 다섯 가지 요소 중 유일하게 가격만이 백화점, 대형마트를 근소하게 앞서고 있을 뿐 나머지 모든 항목은 민망한 수준이다. 소비자들은 품질 좋고 가격이 싼 물건이 아니라 그냥 가격만 싼 물건이 재래시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결제 수단 다양성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이는 원하는 방식으로 편하게 지불하지 못하고 재래시장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지불할 수 있다는 것인데, 짐작하는 대로 재래시장의 지불방식은 여전히 현금이 압도적이다.
현금만이 살길?
2019년 한국은행에서 실시한 ‘2019년 지급수단 이용행태 조사 결과’에서 재래시장 현금 이용 비중은 78.5%로 신용카드의 13배에 달한다. 재래시장에서는 거의 현금만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전통시장 외 현금이 많이 사용되는 곳은 편의점이 30% 정도로 높고, 소매점·슈퍼마켓이 40% 정도로 나타났다.
편의점과 소매점·슈퍼마켓은 보통 소형 매장으로 구매 단가가 아주 낮은 물건들을 많이 취급하므로 현금사용 비중이 높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재래시장의 현금 이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고, 최근 대도시의 편의점이나 동네슈퍼들은 금액을 불문하고 신용카드를 받는다.
같은 조사에서 지급수단별 종합만족도를 살펴보면 신용카드가 근소한 차이지만 현금보다 높은 만족도를 주는 최고의 결제수단으로 인지되고 있다. 현금은 편리성에서 신용카드 대비 낮게 평가됐을 뿐, 안전성, 수용성, 비용에서 앞서 있지만, 종합만족도는 신용카드가 높다. 결국 지급수단의 편의성은 만족도에 결정적인 요소이고,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면 만족도는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 조사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2005년 한국은행이 실시한 개인별 지급수단 선호도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이때 이미 신용카드가 현금과 거의 유사한 수준으로 선호도 1위였다. 함께 살펴볼 것은 체크카드의 비약적 성장이다. 선호 순위가 2004년 9위에서 1년 만에 5위로 올랐다. 이 15년 전 자료는 결제수단의 판도가 신용카드, 체크카드 등의 플라스틱 머니로 바뀐 지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보면, 15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은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있고 사용하기를 원하지만, 재래시장은 오늘날까지도 현금 사용을 고집하고 있다. 다른 것을 차치하고 결제수단만 봐도 세상과 괴리가 너무 큰 유통채널이 재래시장이다.
재래시장, 왜 가지 않는가?
2018년 전경련에서 조사한 전통시장 관련 조사에서 역시 전통시장을 방문하지 않는 이유 1위가 카드 결제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제품에 대한 신뢰가 없고 다양성도 대형마트보다 떨어지는데 결제는 무조건 현금으로 해야 한다면 소비자들을 앞으로도 계속 외면할 것이다. 재래시장이 고전하는 이유를 너무 단순화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시장의 이용자 측면에서 보면 재래시장만큼 거래하기 불편한 곳은 없다.
결제 수단 외에 불만으로는 주차시설, 교환환불 불가와 품질 불량과 같은 제품의 문제, 고객 응대 태도 불량 등으로 나타났다. 2020년 조사 결과를 보면 환경, 공간에 대한 불만이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첫 번째가 주차 불편, 1위부터 7위까지가 모두 공간과 환경의 문제다. 다섯 번째로 꼽힌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는 다른 곳이 많다’는 非 방문 이유는 재래시장을 방문하지 않는 소비자의 심리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재래시장은 반드시 지켜야 하거나,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유통채널 중의 하나일 뿐이고, 그들과 비교해서 편리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제품도, 거래수단도, 공간도 소비자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 불편하다고 오래 전부터 소비자들은 말해오고 있다. 깨끗한 곳에서 편하게 결제하며 믿을 수 있는 물건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욕심은 아니지 않은가. 소비자는 재래시장이라서 더 특별히 가주어야 하고, 불편함을 무릅쓰고 이용해야 할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은 재래시장이 감당해야 한다.
늦었을 때 외양간이라도 고치기
현재 재래시장은 시장으로서, 유통채널로서는 거의 중증 환자 수준이다. 소비자 관점에서 재래시장은 이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소비자에게는 옵션이 너무나 많다. 대형마트, 백화점, 아니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온라인 유통 채널들이 무서운 기세로 소비자의 생활을 잠식해 있다.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때 상식적인 비즈니스가 이루어져 소비 공급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비즈니스는 성장하고 발전한다. 재래시장이 쇠퇴해 가는 이유는 필요한 것을 제대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케팅이나 비즈니스의 법칙까지 말할 필요 없이 소비자가 필요한 것만을 먼저 제대로 보여주자. 그게 외양간 고치기로 느껴질지라도.
지금부터 신용카드를 받는다고 재래시장이 너무 좋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소비자는 이제 좀 정상이라고 할 것이다. 주차장을 더 짓고 내부 시설이 쇼핑하기 불쾌하지 않을 정도만 되어도, 그리고 제대로 된 제품을 가져다 놓기만 해도 재래시장의 쇠락은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지 않아서 가격이 싼 것이라면 재래시장은 유통채널로서는 수명이 다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럼 사라지는 것 외에 방법이 없을까? 이에 대한 답 역시 소비자들이 주고 있다. 바로 관광 상품이다. 재래시장의 연상 이미지에 유통채널로서의 기능적 인식은 저렴한 가격, 좋지 않은 위생 두 가지 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외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감성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재미, 추억, 정 등과 같은 단어는 향수를 이용한 마케팅에서 사용되는 감성적 혜택일 뿐이다. 그렇다면 좋은 관광지의 조건은 무엇일까? 분석할 필요 없이, 어떤 곳에 여행 갔을 때 좋았는지를 떠올려 보면 된다. 고유의 콘텐츠가 있어 재미있고, 이용하기 편리하고 깨끗하며, 돈 쓰는 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바가지 쓰지도 않는 곳이 대체로 좋은 곳이다. 콘텐츠가 강력하거나 재미있다면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지금 재래시장은 거래를 위한 유통채널로도, 관광지로도 애매하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재래시장을 만드는 상인들의 몫이다. 그들이 관광지가 되겠다면 관광지다워야 하고, 유통채널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다른 유통채널다워야 한다. 재래시장의 현재는 세상의 변화와 동떨어져 있기에 기본에 해당하는 것들을 하루속히 갖춰야 한다. 그게 바로 늦었지만 외양간이라도 고치는 일이고, 그렇게 하나 둘씩 고쳐가다보면 관광지로의 변신이 아닌 유통 채널로서의 경쟁력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수집 > food & drin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럽 식품 업계의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포장 트렌드 (0) | 2021.03.31 |
---|---|
코로나가 바꾼 유통 ‘넥스트 노멀’ 세 가지 (0) | 2021.03.31 |
홈플러스, ‘올라인(Online+Offline)’ 강자 도약 나선다 (0) | 2021.03.31 |
삼해주 (0) | 2021.02.18 |
저칼로리 라면 TOP 10 (0) | 2021.0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