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테토스는 서기 50년쯤 로마 동쪽의 변방인 프리기아에서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관대한 주인을 만나 당시 로마에서 유명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인 무소니우스 루푸니스의 제자가 되어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에게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에픽테토스는 노예 시절에도 총명하고 사색하길 좋아하였는데 주인은 주제 넘는 짓이라며 못 마땅히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에픽테토스의 화를 돋울 요량으로 다리를 비틀었다. 그러자 에픽테토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 주인님! 그렇게 계속 비틀면 다리가 부러집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다리를 더욱 비틀었고 이어 다리가 뚝 부러졌다.
그러나 에픽테토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거 보십시오. 계속 비틀면 다리가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일화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평한다. 이미 부러질 운명으로 정해진 것을 이성으로 간파한 에틱테토스가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도 무가치한 것임을 알고 차분하게 어떠한 정념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인 ‘아파테아’의 경지를 발휘했다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일화가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미화하려고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리를 비트는 것은 아주 역사 깊은 고문 방법 중의 하나이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주리를 트는 장면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에픽테토스의 다리가 주리를 틀어 부러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때의 고통은 엄청났으리라. 아무리 철학공부를 하였어도 고통이 덜했거나 못 느겼을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내공이다. 몸은 아프나 그 영향으로 마음이 괴롭거나 아프지 않은 희유한 마음의 단계를 증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픽테토스보다 6백 여 년 전에 태어난 붓다도 말한 적이 있다.
- 같은 방향에서 날아오는 두 번째 화살을 맞아서는 안 된다.
몸은 비록 괴롭지만 마음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몸이 괴로우면 마음도 괴롭고,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괴로워지는 게 범부들의 삶이다. 날로 희어지는 머리칼, 침침해진 눈, 삐걱거리는 팔다리, 시큰거리는 이빨 등등ㆍㆍㆍ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마음이 움츠려든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움직이는 만큼, 보이는 만큼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늙은 몸을 낡은 수레에 비유했던 붓다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래, 수레가 삐걱거리면 끈으로 동여매서 쓸데까지 쓰면 그 뿐이다.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수레가 낡았다고 마음이 괴로울 수는 없다.
2014년 6월 4일 기초단체장 선거가 끝났다. 모두 선거라는 사회적 평판을 측정하는 제도를 통하여 우열을 가리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하여 머리를 짜내며 애쓴다. 당선자는 웃고 낙선자는 운다. 그러나 에픽테토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평판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관용의 대상이다. 에픽테투스는 어쩔 수 없는 것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지만, 오늘날의 선거판 출연자들은 낙선에 가슴아파하는 이들이 더 많다. 사회적 평판은 바람과 같고 갈대와 같다. 움켜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쏜살같이 빠져나가며, 바람부는 대로 이리 저리 왔다 갔다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 승자든 패자든 웃거나 울지 말지어다. 저 에픽테투스의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그가 웃었듯이.
에픽테토스의 생각을 읽다보면 붓다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의 생각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자신이 제어 가능한 것(인간의 믿음‧충동‧욕구‧행동 등)과 제어 불가능한 것(육체‧사회적 평판‧재물 등)으로 나누었다. 제어 가능한 것에 관심을 두고 개선하라는 가르침을 주었으며, 제어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관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에픽테토스의 저서는 없으나 그의 가르침을 제자인 아리아노스가 엮은 <어록 Discourses>의 8권 중 4권이 전하는데, 이를 간략하게 추린 것이 <편람 Enchiridion>이다. 국내의 여러 역자들이 펴낸 책들이 몇 권 있다. 그 쪽수의 분량도 만만하고 내용도 간결하지만 사람이 사는데 편안함을 주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잠자리의 머리맡에 아니면 여행가방의 모퉁이에 자리 잡으면 어울릴 책자이다.
에픽테토스 어록
1.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별하십시오.
세상에는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사물에 대해 의견을 내고, 의욕을 느끼고, 그것을 갈망하거나 기피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 하는 의지적 활동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본디 자유로운 것이어서 아무런 제약도, 방해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 재산, 평판, 권력 등 우리 스스로의 행위가 아닌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다른 것에 예속되어 있는 부자유한 것으로, 남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본래 다른 것에 예속되어 있는 것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뜻에 따라 좌우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면 장애에 부딪치고 좌절하게 되어 자연히 신과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오로지 그대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남의 것으로 돌리십시오. 그러면 그대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그대를 제지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대 또한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게 됩니다. 그대의 의지에 거슬려서 무엇인가를 억지로 해야 하는 일도 생겨나지 않겠지요. 누구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으므로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적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작은 노력만으로는 이 같은 삶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은 완전히 포기해야 하며, 당분간 미루어야 할 것도 있습니다. 권력과 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겉모습에 좌우되지 마십시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아무리 그럴듯한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이것은 단지 거죽에 불과할 뿐’ 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가진 이성의 잣대로 꼼꼼히 따져 보는 것입니다. 우선 그것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지를 살피고, 만일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언제라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2.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십시오.
욕망에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 혐오감에는 원하지 않는 것은 한사코 피하고픈 바램이 들어 있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실망하고, 피하고 싶은 것에 말려들면 괴로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십시오. 그리고 그 중에서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은 피하십시오. 그러면 원하지 않는 것을 겪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병, 죽음, 가난 등 외적인 것을 피하려고 하면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원망하지 마십시오.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 중에서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피하십시오.
경우에 따라 욕망을 완전히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원한다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면 그대에게 바람직하면서 그대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조차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따라 어떤 것은 추구하고 어떤 것은 적절히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3.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은 관심조차 가지지 마십시오.
그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싸움에 끼여드는 일만 없다면 그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사람, 권력이 많은 사람, 어떤 이유로든 칭송받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겉모양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그대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깨달으면 남을 질투하는 일도, 부질없이 부러워하는 일도 없겠지요. 장군이나 원로원 의원, 또는 집정관이 되는 것보다는 자유인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대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바라지도 말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4. 전후 관계를 꼼꼼히 따진 후 행동에 옮기십시오.
어떤 행동을 하든 전후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음에는 어떤 일이 따를지 꼼꼼히 검토하십시오. 그런 다음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의욕에 넘쳐 무작정 서두를 경우, 예기치 못한 일이나 어려움을 만나면 중도에 포기하게 됩니다.
누구나 올림픽 경기에 나가 우승을 하고 월계관을 쓰고 싶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렇다면 먼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는 무엇을 해여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행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선 모든 것을 규칙에 따라 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엄격하게 가려야 하며, 때로는 맛있는 것도 못 본 척해야 합니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지정된 시간에는 열심히 훈련하고, 찬물이나 포도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습니다. 의사의 처방에 따르듯 트레이너의 말에 완전히 몸을 맡겨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손을 다칠 수도 있고 발목을 뺄 수도 있습니다. 흙먼지를 많이 마셔 기진맥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혹독한 훈련에도 불구하고 경기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경기에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아이들은 씨름 놀이를 하다가도 어느새 검투사가 되고, 트럼펫을 불고, 또 다시 연극놀이를 하니까요.
영혼을 송두리째 바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저 순간순간 기쁘게 하는 것을 좇아 원숭이처럼 흉내만 내다 말겠지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자세히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임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유프라테스 같은 철인을 만나 스스로 그와 같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과연 그대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5종 경기 선수나 레슬러가 되기를 원한다면 팔, 허벅지, 허리가 튼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각기 다른 일을 하도록 재주와 능력을 타고나는 법입니다.
남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어려운 것을 싫어해서는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잠도 줄여야 하고, 어려움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할 때도 있고 하찮은 자들로부터 조롱 받는 경우도 있겠지요. 명예, 일, 지위, 그 밖의 모든 것에서 남보다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과 자유를 얻으려면 이 같은 난관을 기꺼이 헤쳐 나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각오가 없이 지혜로운 삶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갈팡질팡하는 어린애같이 철학자에서 관료로, 다시 정치가로 목표를 바꾸지 말고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한 길 밖에는 갈 수 없습니다. 선한 길을 가거나 아니면 나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이성을 계발하거나, 아니면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철인의 삶을 살거나, 아니면 평범한 사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5. 신앙의 본질은 질서정연한 자연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 명심해야 할 것은 신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즉, 신은 존재하며, 만물을 질서정연하고 공평하게 주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질서를 믿고, 신에 복종하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이 질서를 가장 지혜로운 여성이 이끄는 섭리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신을 원망할 일도, 신께서 우리를 버렸다고 비난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일은 피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그대의 의지대로 되는 것에 대해서만 선악을 구별하십시오.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반대로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길 경우 그 원인이 되는 것을 원망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해가 될 것은 기피하고 도움이 될 것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생물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를 끼친 원인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피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부목 되어 자식에게 올바른 견해를 물려주지 못하면 자식은 부모를 욕되게 합니다. 오이디푸스왕의 두 아들 포리니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서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등을 지고 말았습니다. 왕권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땅을 가는 농부, 뱃사람과 상인,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신을 원망하는 것 또한 모두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섬기기 마련입니다. 인생에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고 피해야 할 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신앙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선조의 관습을 지켜 제사에 올릴 술을 장만하고 첫 번째로 수확한 열매를 순수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너무 넘치지도 과하지도 않게 바치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6. 예언이나 점술보다는 이성에 의지하십시오.
예언이나 점에 의지하는 사람은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예언가나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그 어리석음을 알고 있습니다. 일어날 일이 우리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가에게 갈 때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나 기피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 앞에서 불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점괘이든 선도 악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으며 누구도 이를 방해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생기면 신께 가십시오. 신께서 어떤 신탁을 내리시건 그대가 도움을 위해 선택한 분이 신이며, 만약 그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을 거역하는 것임을 상기하십시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같이 이성이나 다른 기술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점술가를 찾아가야 되겠지요. 하지만 위험에 처한 친구나 국가를 구하기 위해 싸움에 뛰어들어야 하느냐를 놓고 점술가를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죽음이나 불구, 또는 추방을 의미하는 나쁜 점괘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대의 이성은 친구나 국가의 위험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명령할 테니까요.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위대한 신 아폴론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아폴론 신은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친구를 외면한 자를 자신의 신전에서 추방한 바 있습니다.
7. 지금 당장 삶의 원칙을 실천하십시오.
이제 삶에 대해 그대가 깨우친 원칙을 법으로 여기고 지키십시오. 그 원칙 중 하나라도 어기면 불경죄를 짓는 것입니다. 남들이 그대를 두고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마십시오, 그것은 그대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대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언제까지 미루기만 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라도 이성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그 원칙에 동의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대가 할 일입니다.
아직도 남이 대신 그대를 깨우쳐 주고 고쳐 주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 완전한 어른입니다. 게으르고 나태하여 날마다 공상이나 하며 계속 미루고 늑장만 부린다면 절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어리석은 자로 살다가 그렇게 미련하게 죽겠지요.
지금 당장 성숙한 어른으로 살 것을 결심하십시오. 날마다 삶의 지혜를 깨치고, 그대가 최선으로 생각하는 것을 법칙으로 삼고 이를 결코 어기지 마십시오.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영광스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이 그대에게 닥친단 하더라도 지금 그대는 미룰 수 없는 경기에 참가한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실패와 포기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느냐 또는 뒤로 물러나느냐가 결정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완전한 인간이 된 것 또한 이 같은 방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지혜를 닦았으며 이성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 아직 소크라테스같이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소크라테스를 닮고자 애쓸 수는 있습니다.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
에픽테투스는 그리스의 노예였는데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 주인이 하루는 그를 화내게 하려고 그의 팔을 비틀었다. 에픽테투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님! 그렇게 계속 비틀면 팔이 부러집니다.” 주인이 화가 나서 더욱 비틀자 팔이 딱 부러졌다. 에픽테투스는 “거 보십시오. 계속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주인은 엎드려 용서를 빌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그의 말을 모아 어록을 만들었다.
그 책이 <에픽테투스>이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할 수 있는 일은 제 마음을 바꾸는 일이요,
할 수 없는 일은 남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덕행의 길, 수행의 길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끝없이 바꾸려고 노력하는 길뿐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내 마음을 자주 바꾸다 보면 마음을 비우게 되고, 자아(自我)가 없어져 무아(無我)가 되지만, 자기 마음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에고(ego)만 강하게 되어 독선에 빠진다. 이게 어리석음이요 무지막지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안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 두 가지를 구별 할 수 있는 지혜를 내게 허락하시옵소서.......
이로스만큼 불쌍하고,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노예로 태어난, 나 에픽테토스는 신의 친구였네. 절름발이 늙은이인 내가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나이팅게일이라면 나이팅게일의 일을 할 것이고, 백조라면 백조의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나는 이성적 존재이다. 그러니 나는 신을 찬양해야만 한다. 이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그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도록 나에게 주어지는 한 또한 이 지위를 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와 같은 노래에 참여하도록 너를 권면(勸勉)할 것이다.(《담화록(Discourses)》 제1권 제16장 20∼21)
노예와 神의 친구
‘노예와 神의 친구’는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노예는 무언가에로의 ‘구속’을 의미하는 말이고, 신의 친구는 ‘영원하고 완전한 자와의 교섭’을 가지고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 두 말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인생의 역정에 덧붙여질 수 있는 말이겠는가? 여기서 ‘자유eleutheria’란 말은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자유liberty와는 무관한 개념이다. 로마제국 시대의 노예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에게서 ‘자유’란 말은 오늘날의 용어로 풀어쓰자면, 영어의 ‘freedom’에 해당하는 말이겠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원리상 인간이면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의미하고, ‘노예’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해서 만들어진 ‘정신적 不자유’를 의미한다. ‘정신적 자유와 스스로 자초한 노예’의 대조야말로 그의 일생을 통한 철학적 화두話頭이다. 자유와 노예는 자신이 속하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사람에게 속하는 정신의 지위와 태도에 대한 비유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인 신분을 가진 자신의 밑에서 철학 공부를 하던 학생들을 ‘노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지혜로운 자’만이 자유롭다는 스토아적 역설을 반영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적 배경
제논이 아테네에 스토아 학파를 열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나서 20∼30년이 흘러간 때였다. ‘스토아 학파’란 이름은 철학자들이 즐겨 토론하던 건물의 형태, 즉 긴 낭하廊下에 기둥만이 세워져 있는 건물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에픽테토스의 저작은 스토아 철학의 이론과 정수를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의 철학은 무미건조한 형태로 스토아 철학의 이론적인 근거와 토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의 양식과 표현의 특이한 형태를 통하여 스토아 철학이 다루는 중요한 문제이자 개념들인 인간, 신, 이성, 자연에 관한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스토아의 사상을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하며 해석해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가장 진지한 철학자로 평가하여, 그를 철학자의 전형으로 삼고 철학함의 목표를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에 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것에서 이성logos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으면서 그 자신을 이끌어감으로써,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완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네가 아직은 비록 소크라테스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바라는 듯이 살아야만 한다.”(《엥케이리디온》 제51장) 이런 점들이 에픽테토스를 고대 헬라스-로마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만들었다.
특히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치료therapeia로서의 철학을 가르쳤던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하여금 《명상록》을 쓰게 했으며, 오늘날에도 ‘철학의 응용’이라는 측면에서 실천적 철학의 효용성을 가르치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고대의 전형적 원형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치료적 규범들을 《엥케이리디온》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예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이다. (제8장)
병은 육체에 방해가 되는 것이지만, 만일 합리적 선택 자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합리적 선택에 대해서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절름발이는 다리에 대해서 방해가 되는 것이지만, 합리적 선택에 대해서는 방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너에게 일어나는 각각의 사태에 대해서 이것을 너 자신에게 말하라. 왜냐하면 너는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 방해가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지만, 그러나 너 자신에게는 방해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9장)
로마 제국의 스토아 철학의 단계인 후기의 스토아는 새로운 철학적 이론을 제시하거나, 의미 깊은 색다른 사고를 전개하지 못했다. 후기에 접어들어 스토아 철학은 시대적 요청이 그랬었는지 이론적이고 논리학적인 관심보다는 실천적 윤리학과 자연학에 대한 탐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반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초기부터 스토아 철학은 실천적 관심에서 벗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철학이 인생을 이끄는 지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부터 내내 있어 왔던 기본적인 방향이었다. 사실상 제논은 그의 가르침의 초점이 윤리학에 한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명성을 획득한 것은 이러한 철학적 방향 때문이었다.
스토아 철학은 기본적으로 제우스, 신, 이성, 원인, 정신, 운명, 자연 등과 같은 원리적 범주에 기반 하면서 움직이는 철학적 이론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원리는 신적이긴 하지만, 超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였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이성이고, 그 밖의 다른 물질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가족, 개인적 관계, 심지어 자신의 신체까지도 한낱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인간의 사소한 걱정거리, 싸움, 슬픔과 같은 것들은 그저 외적인 관심사들에 기인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는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에 따라서 행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었다. 그 신은 인간을 ‘좋음’으로 이끄는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엥케이리디온》 제53장에서 클레안테스의 유명한 시를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 제우스신이여, 운명의 신이시여, 당신이 나를 이끄소서, 당신이 나에게 정해주신 그 어느 곳이라도 가도록. 나는 주저 없이 따를 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나쁘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다름없이 따르겠습니다.
인생에서의 성공은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측정되며 또 올바른 원리에 따르는 행위에서 평가될 수 있다. 그는 형제애와 같은 것은 자연적인 부모, 동족, 동일한 국가적 영역에서 나오는 것도, 또한 같은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참된 형제애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에 의하여 증명되는 ‘정신적 형제애’이다. 그가 올바른 원리에 따라서 행위할 것을 말하는 경우에, 그 원리는 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그 원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으며, 나아가 ‘신’이야말로 에픽테토스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철학적 근거였다. 그래서 그는 ‘신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담화록》 제1권 제3장 1)라고 말한다.
당신이 무엇이 될지 먼저 너 자신에게 말하라.
그런다음 해야 할일을 하라
First say to yourself what you would be;
and then do what you have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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