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 경험 공유가 가능한 공간을 활용해
블록버스터 전시의 새로운 정의를 내리다.
Wave, Anamorphic Illusion, 2020, COEX K-Pop Square
Photo by d’strict
지난봄, 삼성역 코엑스 건물 위에서 사람들은 가로 81m, 세로 20m의 거대한 수족관 속 일렁이는 파도를 보았다. 작품 ‘Wave’는 보이는 것 그대로 멋진 충격이었고, 사람들은 이것을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해했다.
이 실감 나는 수족관은 대형 LED 스크린이고, 그 안의 일렁임은 8K 영상이었다.
이것을 만든 아트테크 팩토리 ‘디스트릭트(d’strict)’는 2004년 한국 1세대 웹 디자이너 고(故) 최은석을 중심으로 창립한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디지털 비주얼로 설명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앞서나갔다고 자부한다. 초기에는 삼성전자 등 국내외 대기업의 웹사이트 디자인부터 시작했으나 이후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프로젝션 매핑 등 이벤트와 전시에 필요한 주요 미디어 기술을 구현하고 있다. 현재는 이성호 대표를 비롯해 기획부터 하드웨어 설치와 운영까지 모두 실행할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새로운 전기를 준비하며 ‘Wave’를 선보였다. 시작은 단순했다. 디스트릭트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리고 싶었고, 공공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로서 코엑스 옥외 광고판에 무료 설치를 제안했다. 어떤 금전 거래도 없었다.
“디스트릭트는 상업 영역에서 주로 활동해왔지만, 늘 우리만의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는 디자인 회사의 성장 한계를 넘고 싶었습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부문별 전문가가 있는 일본 팀랩이 페이스갤러리를 만나 아티스트로 성장한 것, 제주도 성산에 오픈한 ‘빛의 벙커’전시가 장기 흥행에 성공하는 걸 보면서 때가 왔다고 생각했죠.” 디스트릭트는 이미 이머시브 아트 전시를 안정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다. “2011년 일산 킨텍스 3500평 규모에 런칭한 4D 체험관 ‘라이브파크’는 공간 기반의 엔터테인먼트가 앞으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거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계기였어요. 당시 킨텍스의 겨울 시즌 행사 중 단기간 내 높은 입장률을 기록하는 등 초기 흥행 성적은 좋았습니다.”
라이브파크는 제작비 150억 원, 제작 기간 2년, 제작자 300명이 투입된,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 체험 전시였다. 입구에서 관람객이 웃는 얼굴을 한 번 인식시키면, 전시장 내 프로그램이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반응했다. 가로 100m, 세로 8m의 초대형 스크린 앞에서 캐릭터와 게임도 할 수 있는 디지털 놀이터를 표방했다. 2011년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수상을 비롯해 당시 일본과 중국 등 국내외 전문가들의 극찬이 이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실익은 내지 못했다. 킨텍스와 맺은 초기 계약 조건이 달라졌고, 대전 엑스포과학공원으로 이전해 이어가려던 전시 일정이 취소됐다. 그때의 확실한 실패는 지금, 그들만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올 가을 제주도 아르떼뮤지엄에서 소개할 작품. Aurora, Multi-channel Projected Installation with Sound, 2020
Photo by d’strict. Copyright 2020 d’strict, All Rights Reserved
Samsung Galaxy Brand Studio, 2018
Photo by d’strict
“팬데믹으로 실내 생활의 비중이 늘어난 만큼, 실내 체험의 필요성도 커질 거예요.” 이성호 대표는 최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서, 비단 팬데믹 때문이 아니더라도 몰입형 체험 전시의 필요성이 커졌음을 느낀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미술관에 가서 논다’는 개념이 확실히 자리 잡았고, 지금의 관람객은 블록버스터 전시를 데이트 코스 또는 놀이 자체로 즐긴다. 인스타그램의 사진 인증도 당연해졌다. 이성호 대표는 블록버스터 전시와 이머시브 아트 구현을 통해 잔뼈가 굵은 팀의 수장으로서 미래를 낙관하고 준비했다. “인스톨레이션 아트, 비디오 아트를 전문으로 하는 디스트릭트의 작가 브랜드 ‘에이스트릭트(a’strict)’를 운영 중입니다.” 8월부터 국제갤러리 K3에서 공개하는 이들의 첫 번째 작품은 가로가 긴 영상, 즉 애너모픽 기술을 이용해 전시장 바닥과 벽면, 거울을 활용한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파도 속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아트 유닛 에이스트릭트는 올 연말 인스톨레이션 작품으로 마이애미 아트 바젤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디스트릭트의 저력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디스트릭트가 서울 마곡에 위치한 넥센타이어 R&D센터 1층 로비 공간에 설치한 가로 30m, 세로 7m의 대형 미디어 아트 ‘더 인피니티 월’도 좋은 예다. 공간에 서 있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의 눈높이와 착시 수준에 따라, 작품을 설치한 공간의 실제 배경과 오버랩되는 디테일한 배경 설계로 화제를 모았다. 디스트릭트의 노하우면서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블록버스터 전시의 기준이다.
“아트와 디자인, 상업과 비상업 작업의 차이를 굳이 정의하고 싶진 않아요. 오히려 제게는 컨템퍼러리 아트라는 것이 전부터 철저히 자본에 따라 움직이는 카르텔처럼 여겨졌죠.” 이성호 대표는 2007년 디스트릭트에 합류, 팀이 국내 최고 아트테크 기업으로 성장해온 10여 년을 함께했다. 회계사 출신이라는 이력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는 항상 평범한 관람객의 눈으로 아티스트와 현실의 밸런스를 잡는 중간자로서 일해왔기에 냉정히 말할 수 있다. “‘Wave’를 비롯해 몇몇 프로젝트는 분명 기업의 의도가 개입한 설치였음에도 그 공간을 지나는 사람들은 ‘공공 아트’로 받아들입니다.” 디스트릭트는 지금껏 사람들이 좋아하는 뭔가를 해왔고, 예술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SK CES 2020 Media Façade, Las Vegas, USA, 2020
Photo by d’strict
LG CNS Communication Center, Seoul, Korea, 2020
Photo by d’strict
“기존 블록버스터 전시처럼 저작권 시효가 지난 작가의 이미지 소스를 구해 영상으로 비추는 것만으로는 도심 속 전시에 한계가 있어요. 공간이 주는 시각적 임팩트가 중요합니다.” 또 이들은 최신 블록버스터 전시가 무엇인지 올가을 제주도 애월의 8600평 규모 공간에서 보여주려 한다. 9월 말 오픈을 앞둔 디스트릭트의 ‘아르떼뮤지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상설 미디어 아트 전시관. 시대별 명화와 자연, 이미지 체험관을 비롯해 일반 갤러리처럼 언제든 전시 영상을 교체할 수 있는 특별 전시관도 운영한다. 이들이 고심 끝에 찾아낸 공간은 한때 스피커 제조 공장이었던 곳. 층고가 가장 낮은 곳이 4.5m, 가장 높은 곳이 10m에 이르는 거대한 공간이다.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 시청각을 넘어서는 감각의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점도 잡아냈다. 조사 결과 가족이나 친구 그룹 내에서 관광 체험 코스를 주도하는 것은 80% 이상이 여성이었다. 미술계에서 보는 전시 입장객 조건도 마찬가지다. “꽃과 정글, 제주 풍경과 박물관을 테마로 매핑하고 프랑스 조향사와 협업해 실제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안 공간의 대기나 분위기의 냄새도 느낄 수 있게 할 겁니다.” 이 밖에 또 하나 주목하고 있는 최신 기술은 XR 스테이지. 앞으로 다른 블록버스터 전시에도 적용할 것으로 예상한다. “XR 스테이지는 연기자가 배경 합성이 필요할 때 푸른색 스크린 앞에 서지 않고 무대 자체를 3면 LED로 만들어 그 위에서 연기하도록 하는 장치예요. 촬영 후 후반 작업이 필요 없는 셈이죠. 머지않아 해외 투어를 못 가는 아이돌 그룹이 우주 한가운데서 공연하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전시의 성패는 오리지널 콘텐츠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우리는 백남준 작가의 비디오 아트 레거시가 있는 나라잖아요. 윤종신의 음악을 듣고 거기에 맞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건 저희 같은 팀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오리지널 콘텐츠를 가지고 장기적 경험 공유가 가능한 공간 기반의 회사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글 이가진(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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