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것은 무엇인가요?
''나다운 것은 무엇일까?'
'진짜 내 모습은 뭘까?'
아마 여러분들도 한번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을 것이다. 나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우리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아주 오래전, 이런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받았을 때는 주어진 답을 찾기 바빴다. '그래, 나다운 것은 무엇일까?', '난 어떤 사람일까?', '내가 나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하는 생각을 하느라 이 질문 자체의 맹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이 질문을 다시 접하고 나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질문을 속으로 곱씹다보니 어렸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다운 것?'이라는 질문의 함정
'나다운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나다워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라는 속뜻이 숨어있다. 그리고 이 속뜻은 곧 '내가 나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라는 뜻으로 연결된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나인데, 내가 나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내가 나이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니? 왜 우리는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 자체로 존재하면 안되는 것일까?
'조건'을 조금더 풀어보면 '자격조건'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자격조건'이란 말을 흔히 볼 수 있는 곳은 단체나 동아리의 가입 절차, 기업의 입사 지원서 등이다. 여기서 자격 조건을 따진다는 것은, '조건을 만족하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조건'이 붙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해 이 조건을 따지는 것은 내가 나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나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유체이탈이라도 한다는 것인가?
어쩌면 유체이탈에 가까운 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쉽게 표현하기 위해 육체(겉으로 보이는 내 몸 뿐만 아니라 쉽게 드러나는 내 성격, 자주 표출되는 내 행동, 습관적으로 말하는 내 말투 같은 것들도 모두 포함한다)와 영혼(육체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관찰자)으로 나눠보자. 본래 '나'라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합쳐진 상태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 두 가지가 하나인 채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정도 사회적 자아가 형성되기 전까지 영혼과 육체가 하나인 상태로 자란다.
하지만 내가 '나'를 인지하고 '타인'과 '나'의 다른점을 파악하며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면서부터 영혼은 육체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육체를 벗어나서 육체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함이다. 마치 우리가 거울이 없으면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에게 있어 거울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에 육체를 벗어나는 행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봄으로써 타인과 나의 차이점을 확인하려 한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처음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경험한 이후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럽다면 더이상 분리를 하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반면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계속해서 분리를 경험하며 자신의 모습을 살피려 한다. 계속 나의 모습을 확인하며 내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나를 다듬고 가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 분리가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그래서 한번 빠져나간 영혼이 쉽사리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면, 그때부터 조금씩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영혼과 육체가 하나인 상태로 유지되어야 안정을 찾을텐데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육체가 불안에 떨기 시작하는 것이다. 반면 영혼은 자신의 육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므로 오랜기간 자리를 비워 결국 자신의 원래 육체를 거부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나다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나이기를 거부하고 있기에 나온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지나친 비약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 단순한 질문이 심오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단계는 모두 무의식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난 아직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내가 나이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모습을 거부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가? 우선 우리가 왜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왜 내 영혼은 내 육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된, 혹은 보여질 거라 예측되는 내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서.
둘째, 내가 가진 단점, 혹은 부족한 점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첫째는 외적 가치(다시 말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내 몸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에 대한 수용이 없는 경우고 둘째는 내적 가치에 대한 수용이 없는 경우이다. 조금 다른 가치이긴 하지만 이것들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즉,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에 내 영혼은 내 육체를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 곧 최악의 단계인, 자기 부정으로 연결된다.
자기 부정의 단계. 스스로를 좀먹는,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부정의 극단인 단계다. 이 자기 부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자신을 잃게 된다. 영혼이 아예 육체를 떠나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 단계에 들어서면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원래 상태로 회복하기가 어렵다. 자연 회복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독에 노출되어 자신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는 상태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나다운 것?'의 질문은 온전한 나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에 나온다는 것을 지금껏 얘기했다. 이렇게만 보면 '나다운 것'을 묻는다는 건 결국 나에게 손해만 주는 행동 같기도 하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서 나에 대한 존중이 있는 상태에서 저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 역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위에서 얘기한 모든 것을 뒤집어보라.
내 모습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내 영혼은 내 육체를 떠나지 않을거란 믿음이 있을 것이고 이 믿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더라도 육체가 불안에 떨지 않게 해줄 안정제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정된 상태는 결국 내가 나이기 위한 어떠한 조건도 필요 없음을 인지하게 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조건도 필요없음'을 염두해 둔 '나다운 것?'의 질문은 나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된다.
'어떠한 조건도 필요없는 상태'에서 하는 '나다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럼, 어떤 이점을 우리에게 주는가?
첫째,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둘째, 숨겨진 나만의 개성을 찾게 해준다.
셋째, 자신의 단점을 명확히 파악해 원하는 수준까지 개선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넷째, 자기 부정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긍정성을 부여해준다.
작은 마음가짐 하나가 이렇게나 많은 영향을 우리에게 끼친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일, 온전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일,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 언뜻 생각하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이라고 여길 수 있는데 이런 가장 기초적인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됨을 떠올린다면, 세상은 정말 작은 것부터 시작되는구나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 같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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