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3일 발행
매일 고통을 만난다. 오늘 하루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이 많으며, 내일 또 다른 고통들과 마주해야 한다. 전쟁 전에도 후에도 인류의 시간에서 고통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고통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는 현실에 저항하며 이웃의 고통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진다. 그러니 고통을 사유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우리는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사유하지만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서도 (의미에 숨는 식으로) 사유한다. 고통의 현실 앞에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사유가 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고통에 저항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때로 직접적인 메시지를 구호처럼 외치는 특정한 단체나 무리보다 쉬이 이해할 수 없고, 무가치해 보이며, 세계에서 배제되어 잉여처럼 살아가는 개인의 행위가 보다 ‘구체적으로’ 저항의 육체성을 드러낸다. 그 방식은 비-존재의 방식, 혹은 모호하고 유령적인 방식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호하게 보이는 가상이 의미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려진 현실을 걸러 실재를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 의미의 차원에서 쓸모없는 것들, 무의미한 것들이 우리 삶의 증상들을 이해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개인이 그 자신의 삶의 체험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고통에 저항하는 모습 속에서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존재하여 세계를 확장하고 성찰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니까. 나라는 존재 안에는 언제나 낯설고도 친밀한(uncanny) 타자가 머물고 있으니.(이러한 예시를 폐허를 서술하려 한 제발트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나의 관심은 불안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왜 불안한가. 우리는 왜 불안한가. 인간은 언어라는 의미 체계 속에서 온전히 알 수 없는 타자의 욕망과 마주친다. 아이는 부모, 나아가 법과 공동체가 부여하는 가치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정당화하도록 강제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훈육받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일원이 되도록 요구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인간뿐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보이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하고 모호한 존재들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과잉으로 인한 불안을 느낀다.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면 할수록 자신의 욕망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 혹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타자의 욕망에 부흥하지 못하면 더욱 심해지며, 타자의 욕망에 잘 대응했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무의식적 방어에 의해 일종의 증상이 생기기도 한다. 타자의 욕망의 불가해성이 스스로의 불가해성을 야기시키는 것이다.1)
인간은 결핍되어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가 요구하는 ‘과잉(excess)’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 의미화된 세계 속에 사는 나는 이미 타자의 과잉 욕망에 노출되어 있으며, 타자와의 거리 유지가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결핍을 채워 넣으라고 요구받지만 결핍은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일 수 있다. 나는 내 안의 결핍으로 인해 벌어진 ‘틈’으로 인해 사랑을 만나고, 기표 그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인간에게 불안은 고통스럽지만 더 큰 위험으로부터, 혹은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다가오는 더 큰 불행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려는 신호일 수 있다. 불안이 나의 현실을 증언해 주는 일종의 행위일 수 있다. 내가 어떠한 징후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괴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나를 존재하게 해주는 하나의 힘이 될 수도 있다. 또 만약 내가, 내가 만나는 세계 안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관계(혹은 오염)되어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의 욕망뿐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이 세계의 불안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나의 불안을 이해하거나 잠재울 수 있을지도(나의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나 스스로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제각기의 욕망과 불안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이러한 예시를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통해 보여주려 한다.)
자기 안에 당신을 품은 멜랑콜리 주체
세계를 살아가는 다양한 주체 중 이러한 세계(타자)와 ‘나’의 관계됨을 실재적으로 드러내는 주체가 멜랑콜리자다. ‘멜랑콜리(melancholy)’는 인간의 기본 감정의 일종으로, 우울 또는 비애에 해당한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의학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정신의학 분야에서 계승되고 있는데, 대개 울병(depression)으로 그 의미가 좁혀진다. 그리스어의’멜라이나(melaina)’ 또는 ‘멜랑(melan, 검다)’과 ‘콜레(chole, 담즙)’의 합성으로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체액 중 흑담즙이 과잉된 상태를 말한다.(그리스어로는 ‘멜랑콜리아(melancholia)’라고 불렀다.) 한편 음울하며 무기력하고 움직임이 느린 인간의 경우 흑담즙이 네 종의 체액 중 언제나 우위를 차지한다고 보았으며, 이런 기질은 흑담즙적(멜랑코리코스)이라는 형용사로 불렸다. 따라서 중세 멜랑콜리라는 개념은 우울의 병과 그 기저에 있는 우울의 기질이라는 두 개의 국면을 함께 가지며,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도 완전히 구분해서 사용한 적은 없다. 중세에는 여기에 점성술이 더해졌다. 가령 아르나두스 데 빌라노바는 화성의 색과 열이 담즙의 색과 열에 가까운 점에서 멜랑콜리의 원인이 이 혹성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토성과 관계가 있다는 설도 뿌리 깊다. 멜랑콜리가 각광을 받은 것은 르네상스기 이후로, 제발트의 작품에도 소개되는 독일의 화가 뒤러는 1514년에 날개 달린 여성의 사색하는 모습을 빌려 동판화「멜랑콜리아1」을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묘를「펜세로소」(사색하는 사람)로 장식했으며, 1세기 후 밀턴도 같은 이름의 시를 만들어 멜랑콜리를 찬미했다. 또한 1621년에 목사인 R. 버튼의 저서인『멜랑콜리의 해부학』(우울의 해부)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이처럼 멜랑콜리가 철학이나 예술과 결부되어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일어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는 M. 피치노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그는『인생의 서』(De Vita Liber tres, 1489)에서 지식인이 왜 멜랑콜리 기질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논했으며, 예술의 영감원인 플라톤의 신적 광기를 흑담즙의 작용과 결부시켰다. 19세기 들어오며 멜랑콜리라는 말은 의서에서 모습을 감추고, 대신 우울증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멜랑콜리는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일상어로 정착한다.2)
프로이트는「애도와 멜랑콜리」(Mourning and Melancholia)에서 멜랑콜리를 애도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애도(Trauer)의 감정은 슬픔이란 뜻을 갖지만 단순히 수동적인 정서적 상태가 아니라 작용과 능동으로서의 슬픔이다. 애도는 단순한 우울증과는 달리 상실과 연관되어 있으며 애도는 상실된 대상을 받아들이는 치료의 과정이다, 애도의 핵심은 잃어버린 대상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정동)를 떼어놓는 일이다. 멜랑콜리는 애도와 같은 과정을 겪지만 ‘자의식의 추락’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자신이 잃어버린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애도와 달리, 무의식적인 상실을 경험한 멜랑콜리는 억제가 극복되지 않아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고 자아가 빈곤해진다.3) 한편 도덕적인 이유에서 비롯되는 멜랑콜리자의 자아에 대한 반감은 슬픔의 어떤 내적 작용의 결과이며, 멜랑콜리 환자들의 자기 비난은 사랑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돌려진 것이다. 이는 신경증 환자(히스테리, 강박)처럼 욕망 수준의 동일시가 아니라 원초적 ‘나르시시즘적 동일화’로 인해 대상 리비도가 자아로 흘러들어가 자신이 잃어버린 대상과 동일시하게 되는 경우, 무의식이 바깥으로 드러난 경우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증상과 욕망을 매개로 하는 히스테리나 강박과 달리 자아가 쪼개져 일부가 마치 상실된 대상처럼 취급된다. 이 경우 자아와 대상과의 관계는 자아와 ‘또 다른 자아’와의 관계로 전치된다.(즉 부분대상이 아닌 전체가 된다.) 하지만 대상 상실로 인해 나르시시즘적 퇴행 단계에 머물러 있는 멜랑콜리자에게도 대상은 존재한다.
슬픔에서는 대상이 공허하지만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멜랑콜리의 경우는 (사랑하는) 대상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멜랑콜리의 경우 이렇게 존재하는 대상이 ‘환각적’ 대상일 수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상이 완전히 상실된 경우에도 멜랑콜리적 주체는 그 대상의 사라짐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것을 내면화한다. 멜랑콜리 주체에게도 대상이 존재하며, 이 대상에 대해 멜랑콜리 주체는 ‘동작적 행동(motorisches Gebaren)’으로 반응한다. 달리 말해 멜랑콜리적 주체는 대상에 응답하고 그러한 한에서 그의 반응은 단순히 상념이 아니라 대상적 세계에 대한 동작적 행위로서의 반응이라 볼 수 있다. 멜랑콜리자는 이렇듯 공허한 세계에 대상적으로 관계하고 이를 통해 만족을 얻는다. .4)
프로이트는 멜랑콜리에서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를 ‘양가감정’이 발생되는 시기인 구강기로의 퇴행으로 본다. 또한 이 양가감정에 대한 갈등은 리비도 철회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식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양가감정으로 발생하는 자기 비난의 망상은 조증과 비슷한 어떤 만족을 제공한다. 멜랑콜리자는 상실된 대상 대신 자신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의 추동으로 나타나는 반복강박과 부정적 치료 반응이 전쟁신경증 환자에게도 나타나는 것을 통해, 자아의 자기 비난은 자아이상, 즉 초자아와의 관계에서 비롯됨을 고찰한다. 이는 초자아에 죽음충동이 자리 잡아 자아를 공격하고 자아는 초자아의 공격으로 불안을 느껴서 외부적 대상을 포기하듯, 자아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강박증에서 죽음충동을 추동하는 것이 이드라면, 멜랑콜리에서 죽음충동을 추동하는 것은 초자아다. 그래서 훨씬 강하다. 잘못된 동일시와 승화 작업을 통해 자아는 이드 속에 있는 죽음충동에게 리비도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자아는 죽음충동의 대상이 된다. 이 리비도의 승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멜랑콜리 주체를 해석하는 관건이 된다.5)
라캉은 멜랑콜리의 승화를 거세의 폐제로 본다. 라캉에 의하면, 주체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타자와 소통하는 대신 자신을 정확히 표상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주체는 타자에 의해 소외된 자신의 존재를 자신만의 고유한 환상의 방식으로 채워나간다. 그러나 멜랑콜리는 주체와 존재 사이에 분열이 발생하지 않아 존재의 결핍 대신 과잉이 부과되는 경우다. 이 경우 멜랑콜리는 주이상스의 과잉으로 인해 환상과 망상에 시달리며, ‘사물(la Chose)’과 동일시된다. 여기서 사물과의 동일시는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적인 퇴행 단계에서 대상 리비도 투자가 동일시로 퇴행했을 때,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드리워진다는 것, 즉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를 라캉의 용어로 환치한 것이다. 멜랑콜리가 동일시하는 사물은 욕망의 원인으로서 실재적인 위상을 갖는 ‘대상 a’와 구별되는 충동의 경제에 속해 있는 실재로서의 사물이다. 전자가 욕망의 경제에서 작동 가능한 부분으로서의 동일시라면,후자는 전체로서의 동일시로서, 주체가 사물에 먹히는 형국이 된다. 즉 멜랑콜리에서 사물과의 동일시는 대상 자체의 위상(상징계가 아니라 실재)이 다르다. 사물은 나의 충동이 겨냥하지만 욕망의 환영이 떨어져 나간 대상, 공포스럽고 흉측한 대상이다. 라캉은 이러한 사물을 대상의 찌꺼기라고 말한다. 라캉의 관점에서 멜랑콜리는 대상에 대한 리비도 투자가 지속되며,거세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주이상스가 초자아의 먹이가 되어 더욱 가혹하게 시달리는 경우다. 따라서 자아는 사물의 그림자에 압도되어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멜랑콜리에서의 행위화는 그러므로 사물을 겨냥하는 행위이며, 멜랑콜리의 자살은 일종의 자기 절단으로서의 고유한 분리가 된다.6)
벤야민은 멜랑콜리의 승화를 존재론적 전환의 계기로 삼는다. 벤야민은『독일 비애극의 원천』(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에서 멜랑콜리자들은 폐허 속에서 슬픔과 절망을 느끼기도 하지만 새로운 창조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토성의 영향에 있는 멜랑콜리적인 인간의 모든 지혜는 심연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알레고리가 존재와 의미 사이의 심연으로 침잠할 때 그 심연 속에는 변증법적인 움직임이 격렬하게 들끓고 있다. 토성의 행성을 지닌 사투르누스적인 인간은 마치 아첨꾼의 형상처럼 나태하고 일견으론 어떤 의견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이들이 사물과도 같은 특성을 취하고 있는 질서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간을 두고 하는 모든 결단들은 오직 사물세계의 법칙에서만 충실함을 보여주며, 사물세계는 이러한 충실함을 자신의 주위에 불러들인다. 여기서의 충실함은 비애의 충실함이며, 아래에서부터 의도의 단계들이 지니는 리듬이다. 인간세계 속에서는 이질적이고 잉여적이며, 나태해 보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이 리듬들, 사물세계에 귀속된 이러한 충실함은 피조물의 삶에 활기를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 피조물의 삶으로 빠져들어간다면 외견상 죽은 사물들의 삶조차도 인간의 삶에 대해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물세계에 속하는 질서 속에서 멜랑콜리자들은 창조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그러한 활기를 인간의 삶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에 쏟아낸다. 그러므로 벤야민이 보기에 멜랑콜리자들은 파편화된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엮어 내어 세계를 새로 구성하고, 세계의 진실을 가장 충실하게 파악하여 인간의 삶을 구제하려는 이들이다.7)
충실함에서 나온 모든 맹세와 기억들은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대상이자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대상인 사물세계의 파편들로 둘러싸인다. 실로 부당하게 충실함은 자신의 방식으로 어떤 진실을 표명하는데, 물론 그것은 이 진실을 위해 세상을 배신한다. 멜랑콜리는 지식을 위해 세상을 배반한다. 집요하게 침잠하는 멜랑콜리는 죽은 사물을 구제하기 위해 그것을 자신의 명상 속에서 받아들인다.8)
제발트의 멜랑콜리자들(여기에는 제발트 자신도 포함된다. 제발트 문학은 벤야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은 프로이트가 말하듯, 대상 상실로 인해 세계에 대한 관심을 철회한 채 구강기로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들은 상실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과업을 수행한다. 제발트의 작품에서 멜랑콜리자들은 벤야민이 말하듯, 빛을 발하고 죽어있는 사물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인 사물세계의 파편들로 둘러싸인 채 불행을 서술하는 작업에 매진한다. 이들은 새롭게 생겨나는 형태에는 이미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스러지는 시간의 아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연대기적 역사에 서술되어 있지 않은 몰락의 역사를 찾아 헤매고 퇴락해 가는 사물들을 끄집어 내 ‘사물의 핵심’을 제대로 보려 한다.9) 또한 사물들의 자연사를 기억해 내 폐허가 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사물의 핵심을 찾아 금기와 침묵에 빠진 과거사를 되살려내려 한다.10) 제발트의 멜랑콜리자들은 알레고리적 방식으로, 저항의 형태로서 불행을 서술하는 작업에 매진하는 주체다. 제발트 자신이 멜랑콜리자를 다음과 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 즉 완수되어가는 불행에 대한 심사숙고는 죽음충동과는 공통점이 없다. 오히려 멜랑콜리는 저항의 형태다. 게다가 예술의 차원에서 멜랑콜리의 기능은 단순히 반응적이거나 반동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다. 멜랑콜리,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다시 한 번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본다면, 위안 불가능한 슬픔의 리듬(운동학)이 인식의 리듬과 동일한 집행권을 갖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불행의 서술은 그 불행을 극복하고자 하는 가능성에 연결된다. 글이라는 매개가 없었다면 베른하르트의 기이한 유머도 한트케의 장엄함도 불행이란 경험의 반대 무게로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엔 랍비 샤노흐의 이야기가 딱 어울린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울기 시작한 어느 소년에게 선생님이 어떤 충고를 해주었는지 기억해 냈다.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책을 봐! 책을 보는 사람은 울지 않아.”11)
제발트의 이민자들
W. G. 제발트의 『이민자들』(The Emigrants)은 ‘네 편의 긴 단편들’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각각 이민자를 중심으로 하는 네 편의 단편들 ―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 로 구성되어 있다.12)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간다. 또한 이들 중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를 제외한 세 명의 등장인물은 모두 유대인이며, 고향 상실로 인한 고통과 전쟁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살하거나 자살과 다름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의 상실은 크게 보아 두 축을 이루는데, 하나는 기술 문명의 발전과 그것이 초래한 불균형으로 인한 퇴락 속에서 고향을 떠난 노동 이민자들의 고통스런 삶이고(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테레스와 카지미르, 피니),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쫓겨난 유대인 이민자들이 겪은 고통으로(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막스 페르버), 이들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몰락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들이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체험을 겪는다. 이 네 인물들 중 파울 베라이터와 화가 막스 페르버를 소개하려 한다.
‘철도에서 끝을 본다’
1984년 1월, S시에서 보낸 우편물을 받은 ‘나’는 초등학교 시절 은사이던 파울 베라이터가 일흔네 번째 생일을 맞고 일주일 뒤인 12월 30일 저녁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파울 베라이터가 자신의 뜻에 따라, 혹은 어떤 자기파괴적인 강박 증상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39)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도 파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파울이라는 이상한 유령”(59)이 죽은 뒤 다시 돌아온 것이다.
1935년 여름 자신이 꿈꾸던 교직에 들어선 파울은 약혼자 헬렌 홀렌더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9월 초, 헬렌은 어머니와 함께 빈으로 돌아가고 바로 이어 파울은 헬렌이 빈의 기차역에서 여명이 밝기도 전 출발하는 임시열차에 실려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서 파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사직을 박탈당한다. 한 달 사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쫓겨난 파울은 끔찍하게 말라서 몸이 거의 증발해 버린 모습으로 가정교사를 전전한다. 그러나 불행은 이어진다. 부유한 중산층으로서 큰 잡화점을 하던 파울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그 울분에 심장마비로 죽고, 어머니 역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굴욕적인 거래로 잡화점을 빼앗긴 뒤 우울증으로 죽고 만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던 파울은 일종의 판단력 마비 증상에 빠져 오랫동안 어두운 시절을 외면한다.
파울은 사람의 가슴과 눈이 견뎌내지 못한 것들을 숱하게 겪은 후에도 자신을 내쫓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다. 진심으로 혐오하고 골수에 사무치도록 역겨워하던 S시로 파울이 다시 돌아온 것은 ‘뼛속 깊이 독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74) 화자인 ‘나’는 수업 시간에 파울이 왜 우리들을 그렇게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그것은 전쟁을 자행한 독일인을 향한 경멸이자 자신 역시 독일인이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의 시선이었다.) 유대인이자 독일인인 파울은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재판을 진행한다. 하지만 결국 재판이 진행되면서 증거가 늘어나 그 자신은 더 이상 S시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민자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 파울은 기차에 집착한다. 운행예정표, 운행 시간 책자, 철도의 전반적인 운영 방식,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떤 강박적인 관심”(80)을 가지고 파울은 자신의 집에 모형 철도를 만들어놓는다. 파울은 자신만의 과업에 몰두하며 자신이 구제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사랑하는 약혼자, 부모)을 현재 속에서 애도하려 한다. 파울에게 삶의 모든 행위는 고통의 증언이자 사랑대상에 대한 애도 작업이었다. 파울의 삶을 들려주는 란다우 부인은 나치 시대 독일인들의 비열한 태도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기차의 종착역은 항상 죽음”(80)이라고 파울이 생각했을 거라 회상한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들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커피가게 주인 쇠페를레가 파울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쇠페를레는 테클라에게 반유대인과 결혼한 여자가 자신의 상점에 드나들면 다른 손님들이 싫어할 수 있으니, 아주 정중하게 부탁하건대 앞으로는 자신의 가게에 매일 드나드는 일은 삼갔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13)
먼지와 재의 증언
페르버는 1940년대 말부터 멘체스터의 버려진 건물들 중 하나에 숨어들어 매일 열 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독일에 살다 영국으로 이민 온 서술자인 ‘나’는 공업 도시였다가 지금은 폐허가 된 멘체스터의 도시를 배회하다 페르버의 아뜰리에를 발견하고 그를 방문한다. 페르버의 작업실 안 물건들은 자신이 정리해 놓은 그대로 있어야 하며, 그림을 그리면서 생기는 찌꺼기와 끊임없이 내려앉는 먼지들 외에는 어떤 것도 들어와선 안 된다. 페르버는 사물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집, 사물의 얇은 막들이 한 꺼풀씩 미세하게 분해되어갈 때 생기는 회색 벨벳 같은 침전물 아래에 모든 것들이 가만히 놓여 있을 수 있는 집을 원한다.(203) 페르버의 작업은 매우 독특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온 정성을 다 바쳐 격렬하게 소묘했기 때문에, 버드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을 순식간에 대여섯 개씩 써버렸다. 가죽처럼 두꺼운 종이에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이미 그린 것을 목탄가루로 범벅이 된 모직걸레로 다시 연거푸 지워대는 일은 먼지 생산의 대장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음 날 아침에 페르버가 다시 자세를 취한 모델을 흘낏 보자마자 전날의 그림을 어김없이 또 지워버린다는 것이다.14)
페르버는 왜 그렸다 지우기를 무수히 반복할까? “연속적인 파괴로 인해 이미 상당히 훼손된 배경에서 결국은 불가사의로 남을 수밖에 없는 표정과 눈매를 발굴해 내기”(203) 위해서다. 페르버는 용암이 흐르다 멈춘 듯한 물감 덩어리야말로 자신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이자 명백한 실패의 증거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먼지, 재와 같은 상징적 사물을 통해 고통과 실패를 증언하려 한다.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페르버는 1939년 5월 열다섯 살 되던 해 뮌헨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모는 독일을 떠나지 못하다 1941년 11월 첫 번째 강제이송 열차로 리가로 이송되어 살해되었다. 이후 페르버는 여덟 살 혹은 아홉 살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며 모국어를 잃어버린다. 페르버는 디스크 수액이 빠져나와 신경을 누르는 고통으로 인한 마비 상태가 오랜 세월을 거쳐 자신 안에 뿌리박은 내면의 상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도 고통을 재현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기억상실의 늪에서 벗어나 기억의 흔적을 좇기로 마음먹는다.
1939년, 그러니까 오버비젠펠트에 있는 뮌헨 공항에서 부모님과 작별한 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언어,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희미한 중얼거림이나 속삭임 같은 것으로만 내 안에 남아있는 언어〔…〕무슨 이유에선지 자주 벌어지던 행진이나 축제, 퍼레이드 같은 것에 대한 기억밖에 없는 것은 내가 독일어를 잃고 묻어버렸기 때문일 거야.15)
엄청난 고통, 전면에 그려진 인물로부터 자연 전체로 번져간 후 다시 소멸된 풍경에서 죽은 인간의 형상으로 되돌아오는 엄청난 고통이 내 안에서 파도처럼 솟아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지.16)
1936년 5월 10일자 신문에 실린 뷔르츠부르크의 레지덴츠 광장에서 불온서들을 불태우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조작이듯, 나치가 장악한 새 시대에 열광하는 독일에서 역사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얼굴을 감춘다. 그러므로 페르버에게 독일인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운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다. 페르버에게 기억 작업은 “이 심연에서 저 심연으로 떨어지는”(214) 고통과 같다. 파괴의 역사가 지운 끔찍한 얼굴을 되살리는 “기억 행위란 자기를 파괴하는 고통을 대가”(186)로 치르기 때문이다. ‘살아 있되 죽음을’ 선택한 자들. 이러한 자기 파괴의 고통을 감수하며 기억 작업을 지속하는 페르버에게 그림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너덜너덜해진 종이 위를 맴돌고 있는 지워진 얼굴들”(203)에 대한 증언이다.
제발트 문학 속 멜랑콜리 주체가 수행하는 기억 작업은 물신화된 세계의 강박을 드러낸다. 여기서 세계의 강박은 ‘신화적인 것(mythic)’이다. 신화적인 것은 아버지의 법과 초자아의 세계로서 폭력을 은폐하고 진보의 환상을 주입하며, 주체를 압박하여 공동체의 재건에 희생하게 한다. 제발트의 멜랑콜리 주체들의 애도 작업은 망각을 강요해 진정한 애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폭력을 드러낸다. 여기서의 애도는 상처를 망각하거나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한, 즉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회복 작업의 일환이 아니다. 제발트 문학에서의 애도는 오히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애도의 ‘중지’에 가깝다. 트라우마는 침묵으로 세대 간에 유전될 수 있다.19)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역사적 트라우마 속에 함께 놓여 있다.(제발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뉘른베르크 폭격을 체험했고, 그래서 스스로를 ‘그을린 아이’라 생각했다.) 폭력의 희생된 이들은 폭력적 사건 그 자체에도 상처를 받지만, 그 사태를 망각하려는 주변 사람, 혹은 국가에 의해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애도가 끝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애도를 마무리해 버리는 비극적 상황 앞에서 엄청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멜랑콜리 주체들은 절대로 애도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를 자신의 삶으로 깊숙이 끌어들여 죽음에 이르는 애도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국내 번역본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독일어 원본『이민자들』에는 페르버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실려 있다. 페르버는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형상화한, 오랫동안 기피해둔 기억의 흔적을 좆아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사람들을 그린다. 생명이 극단적인 고통의 지극히 작은 단 하나의 점으로 축소되었다는 것, 숨만 들이쉬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제발트가 작품에 삽입한 이 사진이 페르버의 고통을 증언한다. 또한 이것은 (제발트에게 가장 특권적이고 상징적인 사물인) 먼지(dust)와 재(ash)가 증언하는 것이다.(먼지와 재는 사물세계에 속해 있는 멜랑콜리 주체들이 재현시킨 구제의 산물이다.) 제발트의 사진에 드러나는 부재와 현전의 혼돈된 이미지, 픽션 속에 삽입된 사진은 실재와 가상, 현전과 부재의 경계를 혼란시키는 ‘유령성’을 작품에 부여한다. 제발트 스스로 “나는 사진 속으로 쓰면서 들어가고 쓰면서 나온다.”20)라 말하듯. 그리는 동시에 지우는 작업을 통해 노력과 실패의 산물로서의 ‘파괴와 고통’의 증거를 남기는 페르버처럼, 철도와 관련한 사물들을 모으며 철도를 통해 사라져간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파울처럼…….
영화 ‘멜랑콜리아‘, 저스틴과 클레어
영화를 감상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영화 ‘멜랑콜리아’는 카프카의 세계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여러 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어 복잡하고 해석이 불가능한”21) 어머니의 세계. 저스틴의 세계에서 어머니의 세계는 모성이 부재하다. 술에 취한 엄마가 비틀거리며 방향을 잃을 때 아이는 불안함을 넘어 세계를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저스틴의 어머니는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쉴 새 없이 술을 마시고, 주변의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딸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다. 결혼은 무덤이며, 그 무덤 속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딸에게 말한다. 그 냉정함에 주눅이 들어 우울한 저스틴이 어머니 방으로 가서 애정을 갈구해도 어머니는 움직이지 않는다
저스틴: 저 무서워요.
엄마: 다들 그래. 무서워도 참아. 어서 ‘여기’서 나가
‘여기’서는 불안을 잠재울 수 없고 강요와 의무만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나가라고 조언하는 어머니는 저스틴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솔직한 조언자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저스틴의 세계를 모성으로 품기보다 금을 그은 채 한발짝 떨어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과도 세계가 ‘겹치’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을 지키며 혼자 있기를 선택해 버린 것 같다. 아버지는 권위적이지 않지만 무능하고 불쌍하며 유희적이다. 이름이 같은 두 여자 베티 사이에서 희롱하는 아버지 역시 저스틴에게는 아무런 의지가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불쌍함으로 인해 저스틴에게 들러붙어 놓아주지 않는 존재다. 저스틴에게 아버지의 법(초자아)으로 군림하는 인물은 권력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직장 상사와 형부 팀이다. 직장 상사는 저스틴의 사적인 세계인 결혼식장에서도 끊임없이 카피를 뽑아내라고 일을 ‘요구’하며, 심지어 k에게 붙어 다니듯 조수가 저스틴의 뒤꽁무니를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상사는 자신의 조카인 조수가 얼마나 멍청한 인간인지를 떠들지만 ‘생각하지 않는’ 조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동요가 없다. 형부인 팀은 저스틴의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썼기 때문에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요구와 명령의 세계 속에서 점점 지쳐가는 저스틴에게 남편이 될 사람은 세 번째 타격을 가한다. 그가 보여주는 포도밭 속에 저스틴이 추구하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저스틴을 유일하게 보살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염려하는’ 클레어뿐이다.
저스틴: 나 노력했어.
클레어: 알고 있어. 잘했어.
카프카의 세계에서 생각을 하는 피조물은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에 가깝다.(학술원에 보고하는 원숭이, 사냥꾼 그라쿠스, 나비 등). 동물들의 사고 속에는 불안이 존재한다. 불안은 상황을 망치지만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인간들에 비하면 차라리 희망에 가깝다. 저스틴의 말 에이브레헴이 가장 먼저 세계의 종말을 눈치 채듯, 동물들은 인간보다 훨씬 기민하게 세계의 불안을 몸으로 받아들인다.(저스틴은 그 누구보다 말에게 의지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보여주는 세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이미’ 무너졌다. 과학의 완전성을 주장하지만 오류 앞에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족을 버리고 자살해 버리는 팀의 무능함을 이미 알고 있듯, 우울을 주체하지 못한 저스틴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형부의 서재에 꽂혀 있는 도판의 이미지들을 모조리 바꿔 버린 것이다. 저스틴이 바꾼 도판의 이미지들, 우울의 모티프가 되는 이미지들은 본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하나씩 소개된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prelude and Love-Death’가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피터르 브루헐의 ’눈 속의 사냥꾼‘ 등을 감상하게 된다. 특히 ’오필리아‘의 이미지에서 저스틴의 모습이 중첩되어, 순애보와 연민의 이미지로 상징화된 오필리아 대신 새로운 세계로서의 오필리아의 탄생을 암시하는 듯한 인상마저 든다.(멜랑콜리아에서의 오필리아의 이미지. 영화의 표지 이미지로도 사용되었다.) 카프카가 구원의 신화 대신 불안한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듯 저스틴 역시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이 세계에서 구원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종말에 대처하는 저스틴과 클레어의 모습은 극명히 대조된다.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클레어는 극단적인 공포를 느끼는 반면, 저스틴은 그녀 자신의 육체성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멜랑콜리아가 발산하는 빛에 나체를 내맡긴 채 눈을 감고 있는 저스틴의 모습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라스폰트리에는 그녀가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을 암시함으로써 저스틴의 아름다움에 신비감을 더해 준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멜랑콜리아가 거대한 육체를 드러낼수록 저스틴은 점점 더 멜랑콜리아 그 자체가 되어 간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클레어가 저스틴을 챙겨 주었듯이, 이번에는 저스틴이 클레어와 사랑스러운 조카 리오를 챙겨 준다.(조카에게 저스틴은 언제나 ‘강철 이모’였다.) 저스틴과 리오는 그들만의 마법 동굴을 만들어 세계의 종말 앞에서도 의연하게 손을 맞잡는다. 이미 무너진 세계를 구할 수는 없지만,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은 것이다. 카프카처럼.
나는 오늘날의 유럽과 인류의 몰락에 대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 카프카와의 대화를 기억한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신의 머리에 떠오른 허무주의적 사고들이자, 자살적 사고들이다.” 이 말은 처음에 나에게 그노시스Gnosis의 세계상 즉 신을 사악한 조물주로 또 세계를 그 신의 타락으로 보는 신비적 세계관을 상기시켰다. “아니, 그게 아니라”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인 이러한 현상계 외부에는 희망이 존재하고 있을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암,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이 있지.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22)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동음이의어로서, 시카고의 정치신학자인 에릭 샌트너의 설명으로 시작해 보면,
어떻게 ‘살(flesh)’ 것인가? 샌트너에 의하면, 인간은 성욕(sexuality) 이전에 동물성의 잉여 차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동물성의 잉여 차원을 ‘살(flesh)’이라 부른다.
이 차원은 심리적인 것도 아니고 육체적인 것도 아닌 과잉의 잉여물이다.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살과 피’는 잃어버린 고리 혹은 틈이라는, 살의 잉여로 보충되어야 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리비도적 존재(libidian beings)다. 인간은 동물적 감각보다는 인간적인 무엇 속에서 욕망한다.23) 살의 차원은 무정형하고 불안하며 타자의 부름에 온전히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인간은 이 ‘살’로 인해 죽지 못하며, 이 과잉에 의해 주체가 된다. 이 낯설고 친밀한(uncanny) 경험은 증상으로 회귀한 무의식적인 욕망과의 만남이며, 제발트의 작품 속에서 경험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멜랑콜리자들의 유령성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유령적인 것은 카프카의 그라쿠스처럼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산-죽음(un-dead)‘의 형상 혹은 ‘이미 죽은 자‘의 이미지로 드러나며, 드러날 수 없는 실재(the Real)를 더욱 잘 드러내는 가상이다.(제발트는 사진 이미지를 통해 이 유령성의 재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산-죽음’이라 불리는 동물성의 잉여 차원에 의해 추동된다. 살의 차원, 인간의 피조물성을 형성하는 동물성의 잉여의 차원을 과도하게 의미화하려 할 때 인간은 불안해진다. 하지만 인간은 이 살의 차원으로 인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라캉에게 충동은 타자의 요구에 따라 분절된다. 나아가 타자의 요구에 대한 고착으로 인해 퇴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 라캉에 의하면 충동은 한편으로는 언어와 접속되어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언어의 불가능성, 언어의 간극과 접속되어 있다. 따라서정신분석의 윤리는 실재에 대한 방어로서의 욕망을 떠받치는 환상을 통과해 충동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충동이 다다른 곳에서 주체로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타자에 의해 과잉으로 억압된 주체의 환상을 스스로 횡단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주체, 말하는 주체의 실천에 있다.24) 이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충동을 억압하는 가장 강력한 법의 차원(아버지의 법)인 초자아로의 벗어남을 말하며, 기술문명에 의해 더욱 신화화와 물화가 촉진된 세계, 의미화된 세계에서 유도하는 환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행을 말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는 상실된 육체성을 되살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미쉘 앙리가 『야만』에서 주장하듯25), 문명 속에서 객관적 앎의 세계에 둘러싸인 채 육체에서는 분리되어, 세계를 아는 대신 삶을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근대적 야만의 상태. 삶을 이해하는 감각이 마비되어 타인의 고통을 알기만 할 뿐 이해하거나 육화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지금. 우리에게는 살의 차원, 육체의 차원에서의 실천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공부 바깥에서, 불안을 넘어서는 세계와 만나기 위해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정화 (비평, 에디터, junghwa-11@hanmail.net)
1) 프로이트는 인간은 동물의 본능과는 다른 충동을 가지며, 충동은 단순히 본능 차원에 있는 성욕이 아니라 정신 속에 있는 신체적 욕구의 대표자라 설명한다. 육체의 자극이 표상과 결합할 때 정동(affect)이 발생하고, 그 결합이 충동이라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뀐다. 그 결과로 나타난 증상의 과잉이 자아와 연합하지 못하고 육체 속으로 전환될 때 히스테리가, 정동만 남고 표상으로 대체될 때 강박증이, 내용과 정동이 유지되지만 환각을 통해 방어를 조장할 때 편집증이 발생한다(S. 프로이트,「원고 H」,『정신분석의 탄생』,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11; Eric L. Santner, On the Psychotheology of Everyday Life: Reflections on Freud and Rosenzwei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p. 8.
2)『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3) 이런 현상은 강박증자에게도 볼 수 있는데, 자아이상이 지나치게 커서 양심의 심급이 비대해질 때, 자아이상에 부합하지 못한 강박증자의 경우 분열이 점점 더 심해지게 된다. 하지만 멜랑콜리자는 강박증자와 달리 자아는 분열된 반면 언술은 통합되어 있다. 그래서 멜랑콜리자가 하는 자기 비난의 경우는 항상 진실을 뜻한다.(S. 프로이트,「애도와 멜랑콜리」,『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2011,244쪽;“Mourning and Melancholia”, SEXIV, London: Hogarth Press, 1973, 249쪽).
4) 프로이트와 벤야민이 논의하는 “현대의 알레고리와 멜랑콜리는 분노의 흔적을 지님으로써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보다 능동적인 미학적, 주체적 장치”가 된다. 또한 심각한 정신병 상태에 있는 멜랑콜리와 달리 벤야민이 적극적으로 부여하는 멜랑콜리자는 “애도작업을 거친 승화된 멜랑콜리자”다.(홍준기,「변증법적 이미지, 알레고리적 이미지, 멜랑콜리 그리고 도시: 벤야민 미학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 Journal of Lacan & Contemporary Psychoanalysis Vol. 10 No.2, Winter 2008, 46쪽).
5) 프로이트,「자아와 이드」,『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2011,404~405쪽
6) 맹정현,『멜랑콜리의 검은마술』, 책담, 2015, 219~273쪽.
7) 벤야민에 의하면 멜랑콜리 이론은 점성술과 관련이 깊었고, 특히 별들이 미치는 영향들 가운데 최악의 불행을 가져다주는 토성(Saturnus)의 영향이 멜랑콜리 기질을 상징했다. 벤야민은 멜랑콜리적 인간의 특징이 아케디아(Acedia), 나태한 마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희미한 빛을 발하는 토성의 느린 운행은 이 나태함이 멜랑콜리적 인간과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W. 벤야민,『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 김유동 옮김, 한길사,2009, 232쪽).
8) 벤야민, 위의 책, 234쪽.
9) 신혜양,「망각, 고향상실 그리고 구원으로서의 글쓰기」,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2006, 383쪽.
10) 이를 시카고대학 정신신학자인 에릭 샌트너는 ‘유령적인 유물론’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노력은 벤야민이 생전에 추구했던, 물신화된 역사의 흔적을 파편적으로(알레고리적으로) 되살려 잊힌 사물들 속에서 생생한 피조물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깨어나게 하려 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전개하는) ‘역사적인 유물론’과 연계된다. 제발트의 소설에서는 이어 살필 파울의 ‘철도 프로젝트’와 상응할 수 있다. Santner, Eric L, On Creaturely Life: Rilke,Benjamin, Sebal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p. 57.
11) W. G. Sebald,Die Beschreibung des Unglücks, Zur österreichischen Literatur von Stifter bis Handke, Frankfurt am Main 1994, p. 11.
12) W. G. 제발트,『이민자들』, 이재영 옮김, 창비, 2008(이하 본문에 페이지 표시).
13) 제발트, 앞의 책, 59쪽.
14) 제발트, 위의 책, 203쪽.
15) 제발트, 위의 책, 228~229쪽.
16) 제발트, 위의 책, 213쪽.
17) 제발트, 위의 책, 213~215쪽.
18) 샌트너는 제발트가 이러한 기억의 흐려지는 과정을 기억을 재현하는 과정으로 역전시킨다고 말한다. 작품 속 서술자인 ‘나’는 고통스러운 느낌 때문에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의 흐려짐 속에서도 그 고통의 느낌은 생생하게 남아 ‘유령적인 물질성’으로 경험을 현재화한다. 여기서 유령성이라는 의심스런 감각의 매개물로 등장하는 것이 사물과 관련한 사진 이미지다. 제발트는 으스스하고, 지독하고, 유령적이고, 기괴하고, 무엇보다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사진을 통해 드러낸다. 샌트너는 제발트 문학을 ‘모호한 아름다움(the kind of dark beauty)’이라 칭한다.(Santner, Eric L, On Creaturely Life: Rilke, Benjamin,Sebal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p. 62-63)
19) 마리안 허쉬는 이를 ‘후기억(postmemory)’이라 설명한다. 허쉬에 따르면 이러한 이른바 사후 트라우마의 경험은 가족이나 민족, 국가뿐 아니라 동일성을 체험하는 공동체 내에서는 공유될 수 있다.(Marian Hirsh, “Holocaust Photographs and the Work of Postmemory,”Visual Culture and the Holocaust, edited by Barbie Zelizer, Rutgers Uni. Press 2001 참조.
20) Christian Scholz, “But the Written World is not a True Document,” A Conversation with W. G. Sebald on Literature and Photography, Los Angeles 2007, p. 104.
21) 『카프카 변신의 고통』, 클로드 티에보, 김택 옮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22)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 반성완 역, 민음사, p. 68.
23) Santner, “Toward a Science of the Flesh”, p. 74.)
24) 맹정현, 위의 책, 243쪽.
25) 이은정 옮김, 자음과모음, 2013.
http://www.critic-al.org/?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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